좋아하면 닮는다: 반려동물과 반려인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동물병원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 중 하나는, 서로 닮은꼴인 반려동물과 반려인의 모습이다.
단순히 생김새가 아닐 때도 있다. 분위기, 인상, 성격, 그도 아닌 것 같으면 그 어딘가, 어딘가 그들은 놀라울만치 비슷하다. 그래서 닮았다. 10년 전 쯤에 반려인의 뿔테 안경과 똑같은 위치에 무늬가 있는 개를 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서로가 가족임을 밝혀야만 할 때 필요한 그 어떤 복잡한 절차 없이도 그들은 그 누구의 관점에서도 닮아 보였다. 가족이었다.
동업 관계인 절친한 친구 D와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 고양이들, 날 좀 닮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너도 고양이가 있다면 아마 널 닮을걸? D는 나와 알게 된 지 1년 여 뒤에 고양이를 반려하게 됐고, 그 고양이가 1살이 넘었을 때, 고양이는 정말 놀랍게도 D와 꼭 닮은 인상을 가진 성묘가 됐다.
수년 전 해외 반려견 사료 업체에서 반려동물과 반려인의 명함 사진으로 광고를 낸 적이 있다. 모든 쌍이 틀로 찍어낸 듯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앞다투어 반려동물과 반려인 외모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반려인은 반려동물을 선택할 때, 놀랍도록 자신과 닮은 종을 선택한다. 반려동물 또한 자신과 닮은 반려인에게 더욱 친숙함을 느끼기 쉽다. 어떤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반려동물과 반려인 쌍을 맞출 확률이 커플 쌍을 맞출 확률보다 훨씬 높다고 했다. 정답률은 80%. 보통의 문제에 답을 맞출 확률보다 높은 수치가 아닐까.
나의 고양이들도 나를 꽤나 닮았다. 보통은 그들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지만, 한 번 알아차리고 나면, 어느 순간이든 묘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다. 외모든 성격이든, 아니면 사소한 습관이든. 고양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보는 일만큼 생경하고 기쁘기까지 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을까.
나의 첫 번째 고양이는 비교적 무심한 성격의 고양이였다. 다정다감하지 않다기 보다는, 오히려 좋아하는 장난감도 동생에게 선뜻 줄 만큼 따뜻했고, 동생이 머리를 내밀면 핥아 줄 정도로 자상했다. 내성적인 탓에 감정을 드러내길 꺼리는 그의 모습에서 나를 봤다. 무표정해서 가끔은 오해를 사는. 그래서 우리의 친밀한 시간은 대부분 손이 닿는 근처에 있는 것이면 족했다.
반면 나의 두 번째 고양이는 예민하지만 항상 사랑받기를 원하는 고양이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과만 있고 싶어 하는데다 변덕스럽기까지 하다. 다른 가족도 꽤나 노력하는 눈치지만, 신기하게도 달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누군가에게 그녀를 다루는 법을 설명해서 성공한 적은 없다. 단지 이해하기 때문에 나는 알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우리는 가장 많은 시간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보내고 있다.
반면에, 나의 세 번째 고양이는 정말이지 명랑하고 끈질긴 고양이다.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해 내고야 마는 성격 덕분인지 지금까지의 나의 고양이 역사상 가장 즐겁고 저돌적인 성격의 고양이가 됐다. 항상 무언가에 몰두해 곤란한 일들을 벌이는 것이 그녀의 일과다. 닫혀 있는 상자를 열고, 디딤대 없이도 어딘가에 올라가고, 잠깐 둔 물건은 없어지기 일쑤다. 그녀를 말리는 일이 얼마나 역효과인지 나는 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몰두하는 방식을 택했다. 같이 노는 일이 서로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고양이들은 모두 나의 어떤 부분이 극대화된 존재다. 최근에 들어 D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 자신의 일부를 닮은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행위는 곧 자기애가 아닐까? 하지만 역으로 그들 또한 나를 사랑하고 있거나 최소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자기애다. 놀라운 점은, 나의 어떤 부분 또한 다른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그들끼리도 그 비슷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첫 번째 고양이는 까다로운 두 번째 고양이를 얼마든 포용해 주었다. 하지만 두 번째 고양이는 마이페이스인 세 번째 고양이를 그닥 환영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고양이와 세 번째 고양이가 만날 수 있다면, 아마 관대한 그는 두 번째 고양이에게 하듯 세 번째 고양이 또한 품어 줄 것이다. 아마도 나는 멋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예민한 성격으로 꾹 누르면서 살아 온 것 같다.
최근 나는 세 번째 고양이를 닮았다는 말을 지인으로부터 많이 들었다. (그 덕분인지, 유일하게 나와 함께 스튜디오에 사진을 찍으러 간 적도 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시기에 세 번째 고양이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훗날 다른 고양이가 나와 인연을 맺는다면, 그 고양이는 그 때의 나를 닮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는 만약 고양이를 아주 아주 많이 키우면 그들을 모두 모아 둔 존재는 내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들을 모으고 또 모아 내가 되어 버린다면, 그들이 없는 나는 더이상 내가 아니게 될 것 같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들도 나와 같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함께 살다 보니 저 인간, 나를 닮아 버려서 좀 곤란한데,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