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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영 Jan 14. 2021

칩거 일기

 그날 아침. 눈은 이미 거실 창밖으로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내리다'는 표현보다는 '휘몰아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자비 없이 거셌다. 간밤에 마당 잔디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눈밭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늘 아래 온통 새하얬다. 온종일 구름으로 가득 덮여있던 하늘은 아주 잠깐 푸르렀다가, 다시 잿빛이 되었다.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득 그들의 행방이 궁금해졌지만 알 길이 없었다. 언젠가 새들의 안부를 물으러 가야지. 먼발치엔 어깨를 맞댄 나무들이 하나같이 경직된 모습으로, 그럼에도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듯보였다.




 “제주도 57년 만에 첫 한파경보래.”

 한때 동거인이었던 앞집 서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렇게 며칠간 연이은 폭설이 시작됐다. 준비 없는 고립이었다. 나는 물론, 내 차도 제주에서의 눈사태는 처음이라 옴짝달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작년 예기치 못 한 폭설에 민재는 수동기어로 강원도 눈길을 운전했었지. 다음에 나도 배워둬야겠다. 다행히 식자재는 넉넉했고 LPG가스도 충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차였다. 난로용 등유도 적당히 아껴 쓰면 그럭저럭 난방에 보탬이 될 수 있을 듯했다. 완벽하진 않아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들으며 요가를 했다. 보통 눈을 감고 플로우를 이어가는데, 이 날따라 창문으로 몸을 던지는 눈송이가 자꾸만 내 시선을 빼앗았다. 그 과감한 몸짓이 내 기분을 조금 산뜻하게 만들었다. 저 작고 가벼운 개체들도 바람 따라 기꺼이 제 몸을 내던진다. 나도 그러고 싶어 평소보다 깊게 몸을 열어보았다.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음. 이럴 때일수록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유지해야지. 해서 오랜만에 김치찌개를 끓여보았다. 외숙모가 만들어 주신 김치를 기름에 달달 볶다 물을 자작하게 붓고, 스팸은 안 먹어도 이건 먹겠지, 하며 엄마가 잔뜩 챙겨준 참치캔 하나를 따 넣어 폭폭 끓였다. 외숙모의 손맛에 엄마의 마음을 더했더니 따로 간을 안 해도 맛이 기가 막혔다. 갓 지은 현미밥 한 공기에 김치찌개 한 그릇을 천천히 먹었다. 매일 아침 김치찌개를 끓여두시는 다애 아버지가 떠올랐다. 가족이 생각나는 맛이었다.

 샤워를 하고 업무를 하다, 회사 동료들과 어김없이 화상 미팅을 하며 서로의 안부부터 물었다. 판교는 어떤가요? 강남은요? 어젯밤 퇴근길에 폭설로 새벽까지 집에 도착 못 한 친구와 통화를 했어요. 택시가 몇 시간째 제자리라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어요. 아참, 그 후로 소식을 못 들었는데. 집엔 잘 도착했겠죠? 제주는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해 벌써 쌓였어요. 이제 전 아무 데도 못 나가요. 하하. 사실 폭설이 아니어도 늘 집에서 일했으니까 별다를 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어디까지 공유했었죠?

 그렇다. 나는 폭설이 아니어도, 코로나가 아니어도 재택근무하는 환경이라 딱히 답답함을 느끼지는 못 했다. 단지 기분이 눈 쌓이듯 아주 천천히 다시 가라앉으려 할 뿐이었다.




 이럴 순 없지. 기분 전환을 하자. 우선, 눈이 그치고 난 후 한라산을 등반하기로 결심했다. 곧장 평일 아침 성판악 코스를 예약하고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편히 다녀오라는 말에 마음은 벌써 편안해졌고 한라산에 오르는 상상만으로 가슴은 이미 두근거렸다.

 대개는 일하며 줄곧 음악을 듣는데 이날은 좋아하는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김하나의 측면돌파>와 시사 팟캐스트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었다. 어떤 구간은 여백처럼 허공에서 퍼져나갔고 어떤 구간은 귀에 꽂혀 잠시 일을 멎게 만들었다. 김하나 작가님은 어쩜 저렇게 우아하면서도 재치 있게 말씀을 잘하실까. 게스트로 나오신 김금희 작가님 정말 재밌다, 이번 회차는 밑도 끝도 없이 웃기기까지 하네. 아, 재미하면 넉밀스지! 내친김에 유튜브로 넉살과 던밀스의 컨탠츠까지 몰아 들었다. 덕분에 일도 재밌게 느껴지는 효과(?)를 보았다.

 어느새 창밖이 어둑해지자 자연히 난로로 손이 갔다. 거실의 조도를 낮추고 난로를 틀어 노란 불빛을 밝혔다. 엄마가 보내준 고구마 네 개를 뽀득뽀득 씻어 호일에 싸 난로 위에 얹었다. 타닥타닥 고구마가 익어갈 동안 난로 앞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으로, 역시나 <김하나의 측면돌파>에서 미리 접했다. 김소영 작가의 말과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몇몇 어린이들이 뇌리에 스쳤다. 그 어린이들을 만나면 나도 이렇게 말해봐야지, 나도 이렇게 바라봐야지. 수십 년을 더 살았다고 더 나은 존재라고 착각하지 말아야지. 이 책은 선물하기도 참 좋겠다! 알맞게 잘 구워진 고구마를 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잊을 뻔했던 영어 과외 숙제까지 제출하고 말끔히 씻은 후 침대에 누웠다. 하루가 또 금세 지나갔네, 아쉽게. 아쉽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상견니>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넷플릭스와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앞집 녀석이 남자 주인공의 매력을 어필하는 바람에 <브리저튼>을 시작하고 말았다. 아, 그리 재밌진 않은데.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되네. 자야 하는데... 어째서 그만 두질 못 하지? 듣던 대로 남주는 정말... 이런... 왜 눈이 감기지......




 식단만 달라진 칩거생활 끝에 밖으로 나온 건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차만 못 다닐 뿐, 내 두 다리로 얼마든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생각을 왜 그제서야 했을까. 나는 모처럼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집 앞을 서성거렸다. 하얀 집들이 눈 속에 파묻혀 더 하얘 보였다. 그러다 우두커니 앞집에 섰다.

 "산책 갈 건데, 같이 갈래?"

 잠시 후 나타난 서지와 함께 눈길을 산책했다. 작년 초봄엔 제법 자주 걸었던 길이다. 제주도에 막 정착해 마음이 어수선할 때 집 뒤로 난 골목을 따라 무작정 걷던 길. 처음 달렸던 러닝 코스이자, 4월에 엄마와 함께 걸었던 데이트 코스. 길과 밭 사이에 빼꼼히 고개 내민 돌담이 없었다면, 그 사이에 제멋대로 자란 잎사귀가 없었다면 그곳은 사방이 눈 천지라 데굴데굴 구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긴 밭인데, 눈밭이 되었네. 익숙한 장소는 계절의 변화에 무결히 생경했다. 어느 농장 눈밭 위로 키 작은 귤나무가 예쁘게 피어있었다. 서지와 나는 아무도 없는 동네 어귀를 샅샅이 탐험하며 걷고 달리고 누웠다. 눈밭에 누우면 그렇게 포근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실컷 눈밭에서 뒹굴고 놀다 각자의 집에 들어가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서지는 유부초밥과 만두를, 나는 콩고기 함박스테이크를 내어 우리 집에서 함께 먹었다. 가끔 이렇게 같이 밥 먹는 것도 좋잖아, 가끔은. 때때로 나의 끼니를 챙기는 서지가 나는 참 고마웠다.




 며칠 동안 쉼 없이 눈이 내렸다. 그러는 동안 눈송이처럼 그리운 사람들이 몇이고 다녀갔다. 앞집 서지도 다녀갔다. 이러라고 눈이 내리는 건가. 제법 따뜻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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