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경을 맞이하여
나이가 들어 어느덧 노안이 오니 불편한 것은 이제는 먼 것도 가까운 것도 다 안 보인다는 것인데, 이게 이만저만한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중 하나. 눈썹을 핀셋으로 뽑아서 선을 다듬은 지 거의 30년이 되었다. 까맣고 두꺼운 눈썹이 얇은 핀셋에 제대로 잡혀서 뽁! 빠지는 그 느낌이 거의 쾌감 수준으로 시원하다. 그런데 이젠 거울 앞에 서서 눈썹을 바라보면 어떤 털이 웃자란 건지 도무지 보이지가 않는다.
안 보이는 눈썹을 확대해서 보고 싶어서 가까운 데 보는 노안 안경을 써봤다. (소위 '돋보기안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보 같다, 참 바보 같다. 눈썹털이 다리털도 아니고 안경알에 가려서 핀셋이 접근 불가한 구역인데 기를 쓰고 안경을 써서 보려 했다니. 나이 들수록 점점 귀여운 짓이 느는구나 싶어 피식 웃었다.
몇 년 전에는 생리가 한 달 미뤄지고 소식이 없어 폐경이 오나 싶었다. 예전에는 생리 안 하면 혹시 또 임신한 거 아닌가 하고 스트레스받았는데 ㅋㅋㅋㅋ 당시 가까이 지내던 동생들에게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 폐경이 오나? 좀 섭섭하네...
그랬더니 페미니스트(나는 지금도 정확하게 페미니스트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스스로 정의하지 못했다)인 그 친구들은 내게 집중포화를 시작한다. 생리 그 지긋지긋한 것 지금이라도 끊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뭐가 섭섭하냐는 거다. 거의 생리를 '우리들의 적'이라고 규명하고 나를 공격하는데, 좀 웃겼다. 생리 끝나는 것이 섭섭하다는 언니는 촌스럽고, 곰탱이 같은 발언을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니 슬슬 이건 웃긴 게 아니라 참담함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긴 그때 그 모임에서 나의 포지셔닝은 다음과 같았다.
어리바리하고, 일은 열심히 하는데 돈이 안 모이는 언니. 파산의 아이콘(실제 우리집은 개인회생으로 돈을 갚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잘 모르고 갚고 있어서 웃기는 인생이었다. 거의 여성학 1세대로 공부했다면서 페미니즘도 잘 모르고, 정치는 더 모르는 언니.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기특하다고 해야 할까.
다 맞는 말이다.
-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피가 나오는데 어떡하냐. 그게 우리 몸인데.
그렇게 말하고, 그냥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 적당한 시기에 조용히 연락을 끊었다.
이젠 정말 폐경이 오는 것 같다. 일주일에 두 팩, 세 팩 쓰던 생리대도 이제는 한 팩도 다 못 쓰고 남는다. 그리고, 여전히 섭섭하다.
1986년 여름 휴가지에서 초경을 하고, 35년 가까운 세월 내 자궁은 수고 진짜 많이 했다. 서운한 마음이 들더라도 천천히 이별할 때다. 나의 젊음과 헤어진 후 만나는 중년의 나를 기대해 보며… 안 그래도 ‘오십은 아직 애기’라는 이야기까지 들은 터라 더 기대된다. 아니 얼마나 뽀송뽀송하기에!!?
2022년에 쓴 글인데, 조금 더 다듬어서 올려보았다. 사실 각 sns 매체마다 올리는 글의 성질이 다르다. 브런치는 단연코 좋은 책의 글귀나 철학, 독특한 자기 경험을 아주 전문적으로 풀어쓴 글이 인기를 얻는다. 지금 내가 여기에 쓴 글은 아주 페이스북이나 쓰레드, 혹은 말랑말랑한 얼룩소(얼룩소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여러 성질의 글이 '다이소'처럼 배열되어서 독자를 기다린다) 플랫폼 용의 '다정한' 글이다.
사실 여기에서 그치고 싶지 않고, '늙음'이나 '나이 들어감'에 대해 예전에 읽었던 책을 좀 뒤져보거나 '지혜로운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소회를 더 치밀하게 정리해서 여전히 진행형인 나의 어리석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자료로 충분히 보여주면 좋으련만 8월의 여름은 내게 그런 마음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글의 밀도를 조금 더 높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이리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중이다... ☞ ☜ )
이 글을 쓴 뒤 2년이 지난 지금은 완전히 폐경이 되었다. 폐경이 되고 나니 '와!' 소리가 날 정도로 아주 좋은 것 중에 하나는 마음만 먹으면 수영 강습을 한 달 내내 빠지지 않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전에는 월경이 시작되었거나 둘째, 셋째 날쯤이면 언감생심, 수영장 근처에도 못 갔었다. 그 핑계로 운동도 잠시 쉬어가고... 여행 일정도 생리 기간에 맞춰서 옮길 필요도 없다. 정말 내 몸이지만, 내려놓으니 좋다. 대신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여성의 몸에 좋다는 아마씨유나 석류는 정기적으로 챙겨 먹는다. 그렇다고 도대체 언제까지 섹시할 텐가!
아, 요즘 그래도 천착하고 있는 명상의 주제는 '올 인연은 아무리 막아도 오고, 갈 인연은 아무리 붙잡아도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든 자식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모두 다... 2-30대, 한참 연애할 때에는 오는 버스 안 막고, 가는 버스 안 잡는 '터미널 마인드', 이도 저도 아닌 쿨게이로 유명했었는데, 왜 이렇게 주책스럽게 나이 먹고 인연을 붙잡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다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한다. 다른 인연이 온다고 특별히 호들갑 떨며 설레지도 말 것이다.
아, 그리고 내가 실수를 하나 했다. '폐경'이 아니고, 우리 여성들은 인생의 월경 코스를 제대로 완주한 선수들이다. '완경'이라는 단어가 더 좋겠다. 그리고 에세이 <장래 희망은 귀여운 할머니> 이것이 벌써 출간된 지 5주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읽어봐야겠다.
목포의 한 갤러리 카페에서 본 그림이다.
제목은 <어쩌라구> (내가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