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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계꽃 Sep 29. 2020

치질이라도 괜찮아

명절 아침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세안 후 화장대 앞에 앉자마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여름이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창문을 타고 넘어올 무렵이면 다이어리를 펼쳐 내년 달력을 확인한다. 목적은 단 하나, ‘빨간 날’을 확인하는 것이다. 삼일절이나 광복절, 개천절이나 한글날이 주말과 겹치는 불상사보다 나를 맥빠지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설날과 추석 연휴 일수다. 연휴가 명절 당일을 포함해 3일이 넘어가면 널브러진 빨랫감처럼 온몸이 구겨진다. “이번 OO연휴, OOO만 명 인천공항에 몰린다”라는 뉴스는 내게 딴 나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설날과 추석은 감옥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수감 생활은 1년 365일 중 짧으면 1주일, 길면 2주일이 훌쩍 넘어가기도 했다. 여느 교도소가 그렇듯 수감자의 의견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가족 중 누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입을 다물어야 했으며, 일산에서 보령까지 기본 5시간, 때로는 7, 8시간을 내달려 왔음에도 얼굴 한번 쳐다보지 않는 사람에게 꼬박꼬박 절해야 했다. 게다가 이 교도소에는 이상한 규칙까지 있었다. 남자들이 식사를 마쳐야 여자들이 숟가락을 들 수 있었다. 교도소 생활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날엔 열꽃처럼 얼굴에 두드러기가 피어올랐으며 매번 변비와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출소하려면 교도관의 입에서 “이제 집에 가자”라는 말이 떨어져야 했다. 나는 망부석 여인상처럼 방구석에 틀어박혀 그 한마디가 나오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이곳을 탈출할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한가위 보름달에 정성스럽게 소원을 비는 친척들 사이로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해 기도했다. ‘팔다리가 부러져도 좋으니, 내년 설에 호되게 아프게 해주세요.’     




불쌍한 20대 여성의 소원이 달님에게 가 닿았는지 2014년 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항문에 이상이 생겼고 병원에서 치질 진단을 받았다. 치질이라니. 아무리 예능 프로그램에서 항문 질환을 수시로 언급하고 그것이 유머로 승화되는 시대라 하지만 고상한 병도 많은데 하필 치질이라니! 굴욕적인 새우 자세의 충격을 채 수습하기도 전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 말을 들으니 서러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접수대 직원은 설 연휴를 이용해 수술하는 환자가 많으니 서둘러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했고,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며 수술을 예약했다.     


흐느적거리며 집으로 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봤다. 잠깐. 입원하면 명절에 집에 있을 수 있잖아?! 그렇다. 입원은 명절이라는 교도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자 갑자기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 방금 치질 진단을 받았는데도 입꼬리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들뜬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아빠, 나 치질 수술받게 됐어. 그래서 연휴 기간 병원에 입원해!” 치질을 방패 삼아 불쌍한 영혼 하나를 더 구제하기로 했다. 병간호를 명목으로 동생도 남아야 한다 주장했고, 환자의 부탁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동생은 카톡으로 연신 꾸벅대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수술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항문외과로 이름을 날리는 병원이라 그런지 강남 성형외과에서 쌍꺼풀 수술을 진행하는 속도만큼 신속했다. 중병도 아닌 데다 연휴에 집에 있을 수 있다는 해방감에 컨디션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병원에서 주는 밥도 싹싹 비웠다. 그리고 챙겨온 노트북으로 ‘겨울왕국’을 봤다. 이따금 수술 부위가 따끔거려 영 앉아 있는 게 불편했지만 아무렴 정신이 괴로운 것에 비할 수 있을까. 괜찮냐고 묻는 동생에게 짧게 답장을 보냈다. “다시 오지 못할 순간이야. 즐겨.”     


다음 날 아침, 퇴원 시간에 맞춰 동생이 데리러 나왔다. 수술이 잘 끝났다는 기쁨보다 텅 빈 도시에서 명절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짜릿함이 더 컸다. 우리는 병원 1층에 있는 스타벅스로 가서 이 기쁨을 천천히 음미하기로 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시킨 후 커다란 유리창 근처에 앉았다.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며 창밖을 바라보니 이 도시가 전부 내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자매는 한동안 말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도 붐비던 사거리 횡단보도가 황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썰렁했다. 그런데 그 풍경과 커피 향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우리는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자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으로 해방감을 만끽했다.

    

한번 맛본 자유의 달콤함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듬해 나는 서울로 직장을 옮겼고 동생은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둘은 주야장천 독립을 외쳐댔다. 치질 수술 후 두 번의 추석과 한 번의 설날을 보내고서 우리는 독립을 쟁취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주 요양원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었으며, 이제는 가족끼리 명절을 쇠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수감 생활 끝에 교도소에서 출소하게 된 것이다. 스타벅스는 아니더라도 집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명절이, 인천공항은 아니더라도 춘천 정도는 갈 수 있는 명절이 마침내 내게도 찾아왔다.     



* 이 글은 2W 매거진 4호 '우리의 명절은'에 기고한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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