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공부를 하면 책을 많이 읽게 될까?
대학원 간다고 하면, 특히 사회과학 분야의 박사과정을 한다고 하면 - 나는 정책 분야 전공을 했기 때문에 사회과학으로 분류된다 - 다들 책 좋아하나 보다, 책 많이 읽고 싶어서 가나 보다 한다. 적어도 나는 대학원 진학시에 그런 점도 고려가 됐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과연 학위를 따기 위한 과정에서 많은 독서가 가능할까. 나의 경험은 생각과는 전혀 달랐고 이 다른 점은 박사학위 과정의 본질과도 관련이 있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서른 후반에 대학원을 가기로 한 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외국계증권사에서 세일즈 하느라 정신없는 중에도, 돈 밝히는(?) 그 업종 종사자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 적어도 아는 주변인의 평가는 그러했다. 꽤 진지한 신학자나 사상가들, 그리고 경제학자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해당 분야 고전도 곧잘 집어서 읽곤 하는 편이었다. 예를들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나 앤서니 다운스의 ‘경제이론으로 본 민주주의’ 같은 책들을 저녁에 야근하고 회식하고 난 후에, 주말엔 골프치고 난 후에 꾸역꾸역 읽곤 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쟈크엘룰, 본회퍼 등의 기독교 사상가들 책을 여러 번 읽고 독서 모임도 하곤 했었다.
특히 경제학의 효용이론을 정치의 영역에 적용해 양당제의 비밀을 풀어낸 앤서니 다운스의 책은 관심사가 다양한 편인 나에게는 큰 자극이 됐다. 합리적선택이론을 시작한 이 책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단한 수학 공식 없이도 개개인이 각각 자기 표로 얻을 수 있는 효용을 극대화 하다 보면 어떻게 상당수의 민주주의 국가가 양당제로 수렴하는지를 잘 설명해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독서 경험은 왠지 나에게도 영역을 넘나들어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역량을 길러 볼 기회가 있을 것 같은 그런 묘한 기대감을 지속적으로 갖게하였고 실제 논문 주제를 정할 때도 항상 머리 한 켠의 메타포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대학원에 가니 다들 생각하는 독서를 하기란 뭐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면 독서 그 자체만 생각하면 오히려 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학위 과정에 필요한 것은 일반 독서가 아니라 가능한 많은 양의 논문을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도 썼듯이 박사학위란 결국 기존에 없던 지식을 연구하여 그 성과를 일정한 형식의 글로 문서화하는 능력을 인정받고 자격증을 따는 것이기 때문에, 관심사를 찾고, 그 관심사에서 내가 연구하여 새로운 지식으로 만들어야 할 부분을 확인하는 과정에는 일반 서적 보다는 가능한 한 수준 높은 논문을 많이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두번째 이유는 첫번째와 관련이 있을텐데 무지막지한 양의 학술논문이나 서적을 읽다 보면 쉴 때는 활자를 쉬고 싶을 때도 있다. 엄청난 양의 문자를 보고 지내다 보면 일하다가 나름 쉬기 위해 책을 읽던 때 와는 좀 다른 인센티브가 생기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과정은 기본적으로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한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학위를 기반으로 교수 등의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을 가질 계획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꽤 오래전 한참 투자은행 다니던 시절에 아내와 몇 주 미국 여행하던 중 미국에서 교수하는 한 학교 후배에게 놀러갔을 때, 이런저런 얘기하던 중에 그 친구가 (연구하는) 교수 제대로 하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내가 학위를 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석사를 하고 박사과정 중에 어떤 교수님도 연구를 하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셔서 예전 기억이 났었다. 박사학위 과정은 독서를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유리할 것이나, 정작 과정에선 단순 독서 보단 학술적 문헌을 읽는 훈련에 집중해야 할 것이고, 이 후에는 둘 다 꾸준히 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수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