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올해부터 매주 주말 당일로 혹은 1박, 2박으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누벼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남들 다 가서 따라가는 해외여행이 아니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우리나라 유적지나 명승지를 탐방하고 싶었다. 생각보다 가볼 만한 곳이 많았고 아이들은 금요일이 되면 이번 주말에는 어디에 가냐고 물었다.
지난 일요일 여느 때처럼 가족 다 함께 나들이를 나서는 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정한 목적지는 진안이었다. 당일로 다녀오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였지만 전부터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마침 밖을 보니 날씨가 화창해서 가을의 멋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즉흥적으로 세운 계획이다 보니 준비가 늦었다.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꽤 먼 길이니 드라이브 스루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채비를 마치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아침에만 해도 1시간 40분이 찍혔던 거리가 2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로 바뀌었다. 1시간대 거리와 2시간의 차이가 꽤 크다 싶었는데 남편은 더했나 보다. 2시간은 너무 멀다며 목적지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가고 싶던 곳이라 사진 예쁘게 찍으려는 욕심에 공들여 화장도 하고 머리도 한 터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쉬움을 달래는 동안 남편이 말했다.
"가까운 데로 가서 단풍놀이 하고 오자."
"그래. 어쩔 수 없지. 1시간 거리 대둔산은 어때? 이번 주 단풍 절정이라는데"
"동학사는 어때?"
"진안 가고 싶었는데..."
"진안은 다음 주에 가고 다음 주에 안되면 내년에 가지 뭐."
애초에 가기로 한 곳 보다 가까운 곳을 얘기했는데도 반응이 안 좋은 남편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다시 진안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내가 몇 번이나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내년에 가자고?' 남편은 몸이 피곤해서 장거리가 부담되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화를 낸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화낸 게 아니라 서운함을 알아달라는 거였는데.' 서운함과 서운함이 모여 불꽃이 튀었다. 평소보다 더 화가 난 남편은 나들이를 그만두자며 집으로 차를 돌렸다. 도로를 내달리는 바퀴에 돌 튀기는 소리가 났다.
집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차문을 쾅 닫고 내렸다. 분기탱천한 뒷모습이 오랑캐 목이라도 치러 가는 모양이지? 하지만 나는 안다. 잘리는 것은 힘없고 가느다란 저 사람 머리털이다. 머리를 자르고 나서는 분명 골프연습장에 갈 거다. 가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남편은 씩씩거리며 집을 나가서 꼭 두군 데를 들렀다 왔다. 지금 생각하면 갈 데가 두 곳뿐인 가련한 가장일 뿐인데 애들 어렸을 때는 그게 그렇게 약이 오를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집에서 꼼짝도 못 하는데 제 볼일을 보란 듯이 보고 오는 자유라니!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뒤돌아 아이들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얘들아 집에서만 있기는 너무 아쉬우니 엄마랑 나가서 점심 먹고 놀다 들어오자."
"좋아요. 엄마 마라탕 사주세요."
그 짧은 새에 저희들 살 궁리를 해낸 아이들에게 놀랐다. 아빠가 싫어해서 주말에는 안 먹는 마라탕을 먹자는 거였다. '좋았어. 꿔바로우도 시켜야지.' 벌써 몸이 들썩여졌다. 신이 난 애들이 금방 또 말을 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아빠를 안 데려가도 될 만한 곳이었다.
"엄마. 우리 만화카페도 가요!"
"그래. 그러자."
마라탕을 먹고 만화책도 실컷 보고 그러고도 아쉬워 호수공원에 가서 산책도 했다. 5~6시간을 꼭 채워 알뜰하게 놀았다. 가을 햇빛과 낙엽이 어우러지는 곳에서 사진도 찍었다. 저녁도 먹고 들어갈까 하다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밥도 없는데 컵라면이나 먹었겠지.' 하며 집에 돌아오는 길 막내가 물었다.
"엄마. 그런데 누가 잘못한 거예요"
"누구 잘못이 어디 있어. 둘이 싸우면 둘 다 잘못한 거야."
"아빠가 먼저 잘못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엄마랑 아빠 둘 다 피곤해서 예민했어."
맘 같아서는 '네 아빠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길고 긴 기소문을 읊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아빠였으면 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내 사소한 기분으로 남편이 착실하게 쌓아 올린 가장으로서의 권위, 좋은 아빠가 주는 안정감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프로주부로서 내가 부부싸움에 대처하는 자세였다.
집에 오니 남편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싱크대에 빈 컵라면 용기가 놓여있었고 머리는 말끔했다. '그러면 그렇지.'
보통 싸움은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 남편이든 나든 먼저 풀리는 사람이 화해의 시그널을 보낸다. 샤워를 하고 화장품을 바르는데 남편이 옷방 문을 열면서 나를 치고 갔다. 화해하자는 건 줄 알고 씩 웃으며 발끈했더니 남편이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려다 앙 다문다. 실수로 친 거고 아직 화가 안 풀렸다는 뜻이다.
'나는 뭐 풀렸는 줄 아나? 흥이다 흥!'
침대에 누워 이불을 앙칼지게 움켜잡고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저렇게 속이 좁은 남자를 뭐에다 쓰냐 말이다.
다음 날, 남편에게서는 하루 종일 연락이 없었다. 나도 딱히 내 존재감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필 부부동반 모임을 확인해 달라는 메시지가 왔다. 나도 모르게 확인해 버려서 답장을 안 해줄 수도 없었다. 백날 전날 싸울 것도 아니고 내년까지 싸울 것도 아니라 변경사항 없으니 확정해 달라는 메시지를 썼다. 이러면 남편이 단단히 오해할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역시나 퇴근해서 들어오는 남편 어깨가 쫙 펴졌다. 나를 흘깃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며 또 컵라면을 꺼내 물을 부었다. 나는 막내에게 손짓과 입모양으로 아빠에게 김치를 꺼내주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눈치 빠른 막내가 얼른 김치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컵라면을 다 먹은 남편이 내 쪽으로 오는 게 느껴졌다.
"아니. 놀러는 가고 싶었나 봐? 문자에 답장은 왜 했어?"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는 폼이 아주 얄밉다.
"예의가 있지. 어떻게 답을 안 해. 당신 진짜 그럴 거야?"
이미 화해의 무드를 확인한 남편은 갑자기 아이처럼 킬킬거리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얘들아. 이리 와봐. 어제 엄마가 아빠한테 얼마나 화를 냈는지 알아?"
'네 엄마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짧고 궁색한 기소문을 읽기 시작한 남편이었다. 부끄러움은 온전히 우리 몫이었다.
"아빠. 엄마는 어제 우리한테 아빠 흉보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누가 먼저 잘못한 것도 없고 싸움은 둘 다 잘못해서 벌어지는 거라고요."
"그래? 아닌데 엄마가 먼저 잘못한 건데."
"여보. 제발 그 입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