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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원 Nov 03. 2022

배부르지 않다.

 나는 사모님이다. 내가 처음 사모님이 된 날을 기억한다. 신혼 때 당시에 신문물이었던 빨래 건조기를 설치하러 오신 기사님께서 "사모님 건조기 어디에 설치할까요?" 하고 물으셨다. "어...... 어...... 이쪽이에요." 버벅대며 설치할 장소로 안내드린 후에 나는 벙벙했다. '사모님'이라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부를 갖춘 여성 어른을 부르는 말이 아닌가? 예상치 못했던 단어가 너무도 생경하게 느껴졌다.  첫 손주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타셨다가 '할머니'라 불렸다며 당황하셨던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나에게 사모님은 먼 얘기였다. 대학교 때 사모님이 꿈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자기도 엄마처럼 일은 하지 않고 여기저기 놀러 다닐 거라고 했다.  집안도 안정적이고 외모도 고왔던 친구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런 꿈도 있구나 놀랐다. 하지만 배어 나오는 태도, 말투, 어디든 택시를 타고 나타나는 친구의 씀씀이 등에 이렇게 자라면 결혼해서 사모님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반면 근검절약에 궁상까지 더해진 미천한 가문에서 자란 나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신분이었다.

 정황상 사모님이 결혼한 여자를 호칭하는 단어라고 결론이 났을 때는 안도했다. 아 그러면 그렇지.

 결혼 직전 예비 시아버님이 간암 판정을 받으셨다.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결혼을 했고, 나는 쌍둥이를 임신했고, 남편이 아버님께 간이식 수술을 해드렸고, 쌍둥이를 낳았고, 아버님은 병상에서 아기가 이쁘다고 해주셨고, 아기 백일 날 암 재발 판정을 받으셨고, 5개월도 안되어 아버님은 멀리 떠나셨다.

 박사 과정 중이던 남편은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면서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사업체를 정리했다. 5톤 트럭을 몰며 배달도 했고 떼인 돈도 받으러 다녔다. 열흘씩 집을 비우며 농사도 지어야 했다. 서른한 살 아무리 혈기왕성한 성인 남자라 할지라도 버거운 일들이었다.

 지독한 산후우울증이 왔지만 나를 돌볼 겨를은 없었다. 이제 막 기어 다니며 사고를 치고 울어대는 아이들을 보다 멍하니 다른 데를 보는 때가 많아졌고, 나를 보며 웃는 아이를 보아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발에 족쇄가 달린 것 같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고 싶다 했더니 너보다 내가 더 힘들다고 했다. 산후우울증에 무지했던 남편에게 그 말은 진심이었고 사실이었다. 이까짓 일도 감당하지 못하고 하소연했다는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2년의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을 하려던 차에 나는 셋째를 임신했다. 남편은 복직을 반대했다. 연봉이 높지도 않고 무기계약직인데 회사에 왜 미련을 두냐며 아이를 셋이나 두고 복직한다는 것은 모성애가 부족한 거라고 했다. 그저 나를 알던 사람들을 만나서 일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졸지에 모성애 부족한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전업주부가 되었다.

 남편은 이런저런 고생 끝에 기업 연구원이 되었고 아버님 하시던 사업도 잘 마무리하여 임대 사업자도 겸하게 되었다. 사모님에 걸맞은 넉넉한 삶, 그것이 내게 주어졌다.

 시어머니는 내게 남편 잘 만나 호강한다 하셨다. 팔자 좋다 하셨고 네가 뭔 걱정이 있냐며 귀한 아들 잘 챙겨주라 하셨다.
아들 생각하는 귀한 마음이 내게는 가시가 되어 전신에 박혔다.

 중요한 일을 하는 귀한 사람. 나는 왜 그런 사람이 못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공부를 더 잘해서 전문직이나 공무원이 되었어야 했나. 아니면 일찍 돈에 눈을 떠 야무지게 벌었어야 했나?
난들 주인공을 꿈꾸지 않았겠나. 난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하고 싶지 않았겠나.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핏덩이를 두고도 일을 나가야 하는 수만 수십만의 워킹맘에 비하면 얼마나 배부른 소리냐고.

 나는 배부른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소연 대신 열심히 살았다.

 매일 내게 주어진 일상, 아이를 씻고 먹이고 재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하루가 다르게 영글어가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주었다. 도서관에 출근도장 찍어가며  책을 빌려와 읽어주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여기저기 학원이든 체험학습이든 실어 날랐다. 그 와중에 자기 계발도 놓칠 수 없었다. 아이들 영어교육을 위해 나부터 영어 공부를 했다. 독서모임을 세 개 하며 한 달에 대여섯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화실에 나가 그림을 배워 아이들에게 직접 미술놀이를 시켜주었다. 내 작품을 그려 전시회도 참여했다.  애들 품느라 늘어진 뱃살을 없애려고 매일 운동도 했다. 주말마다 시댁 겸 임대 사업장에 가서 일을 돕거나 밥을 하거나 애를 봤다.

 육아와 살림, 자기 계발 사이에서 나는 널뛰기를 했다. 성취감이 필요하기도 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열심히 살고 싶었다. 세상에는 쓰이지 못했을지언정 아내로서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남편 하는 일도 잘 되어 퍽퍽했던 부부 사이도 하루가 다르게 윤기가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공황이 찾아왔다. 때때로 심장이 멎는 느낌, 숨이 가빠지고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 없이 불안해 밤잠을 설치곤 했고, 운전하다 갑자기 발작이 시작되면 어디든 차를 세우고 손을 덜덜 떨며 쉬어야 했다. 나 없이 지내는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편안해진 이 시점에 대체 왜?
'범불안장애, 우울증, 공황 증세 있음'이라고 쓰인 진단서를 앞에 두고도 나는 내가 아플 자격이 있는지를 고민했다. 세상에 이 정도 고생 안 겪은 사람도 없을 텐데 내가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해도 될까? 이것 또한 배부른 소리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분노가 솟는다. 넉넉한 삶은 감사한 거지 부끄러운 것이 아닌데 왜 나는 실체도 없는 것의 눈치를 보고 있나.

 아내로서의 삶이나 엄마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나도 중요하다고 말을 해야겠다. 목소리를 내야겠다. 글을 써야겠다.

 배부르지만 배부르지 않다고.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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