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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ana Jan 25. 2023

낭만병을 조심할 것

육체보다 먼저 정신이 떠나버린 인간

ⓒ오전

여행에 관심이 없을 땐 언제고… 출국 한 달 전, 비행기 티켓을 끊은 순간부터 병이 시작됐다. ‘낭만병’. 필자가 정의한 병명으로, 여행을 떠나면 인생이 꽃밭. 영화 같은 순간이 펼쳐질 듯한 낭만에 과도하게 도취된 병이다.


이 지독한 병에 걸리고 나서는 일과를 보낼 때 사람이 공중에 약간 뜬 기분이었다. 퇴사를 일주일 정도 앞둔 때였는데,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행 계획을 열심히 짠 것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 자유여행이 아닌 ‘어학연수’를 택했기 때문이다.


어학연수를 택한 이유는 같이 여행을 갈 이도 없고 이왕 비싼 비행기 티켓을 끊는 거 해외에 길~게 있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또 처음 가는 해외여행을 홀로 무작정 떠나기엔 조금 겁이 났다.


특히 나의 영어 실력.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 때까지 영어 수업을 들었지만 영어를 뱉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교양으로 영어회화를 들었을 적에 원어민 교수님과 대화를 해본 것 같긴 한데… 10년 전이란 말이지.


하와유. 아임파인땡큐만 자신 있게 뱉을 수 있는 이런 실력으론 혼자 나가도 뭐 제대로 사 먹기도 힘들게 뻔했다. 아마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시키다가 펑펑 울듯한 나의 미래가 뻔해서 자유여행이 아닌 어학연수를 택했다. 목적지는 '몰타'.

ⓒ오전

몰타는 이탈리아 아래에 있는 작은 섬이다. 제주도보다 작은 나라로, 나도 어학연수를 검색하다가 처음 알게 된 국가였다. 몰타는 가고 싶었던 영국이나 캐나다, 아일랜드보다 저렴했고 유럽 여행을 가기에 위치도 딱이었다.


나라가 정해지고 비행기 티켓과 어학원을 등록하기 위해 한국 에이전트를 이용했다. 이 말인즉, 티켓도 어학원도 에이전트가 알아봐 주고 나는 계좌이체만 할 뿐이란 거다. 기간은 3개월로 정했고, 퇴사일도 받아뒀고 떠날 일만 남았으니 마음이 붕 뜨는 건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병색이 너무나 완연한 거지. 해외 드라마를 보면서 나를 주인공에 대입하는 아주 부끄러운 망상,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영어를 출국과 동시에 잘할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 알고 보면 해외가 체질이라 눌러앉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런 것들이 모여 현생보다는 미래에 살고 있는 심각한 낭만병을 앓고 있었다.


어디에 말하기도 부끄러운 낭만병이 씻은 듯이 나은 건 그로부터 몇 주 후였다. 출국 일주일 전. 두려움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살면서 축적된 데이터가 있는데, 나의 기대가 허황됐음을 금방 알게 됐고 배경이 바뀌면 당황할 나의 모습이 예고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현실을 똑바로 보자 낭만으로 부웅 떴던 몸이 쿵하고 바닥으로 꼬라 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해외에 나가기 싫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두려움. 익숙함에 익숙해진 나는 새로운 뭔가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거다.

ⓒ오전

그간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보니 참으로 평탄했다. 어느 집에서 누가 사는지 빤한 작은 동네에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초중고를 나왔고, 성적에 맞춰 조금 먼 대학을 갔을 땐 기숙사에 콕 박혀있었다. 그리고 졸업 후 서울로 이사를 했을 땐, 이미 언니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가족도 함께 터를 옮겼다. 짧게 말하자면 나는 누가 다져놓은 터에 쏙 하고 들어가 살던 대로 살면 됐던 거다.


그럼 나는 익숙한 이가 없는 유럽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할까? 평일엔 어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주말엔 유럽 여행을 간다는 게 가능할까? 내가 꿈꿨던 만큼 해외여행이 그렇게 낭만적이지 못하다면? 그냥 퇴직금만 날리고 돌아오는 건 아닐까? 그럴 바엔 그냥 지금처럼 살아도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후회로 변질될 때쯤 시간은 바삐 흘러 출국 날이 됐다. 고작 3개월을 떠나는 게 이리 버거울 줄이야. 차라리 낭만병이 심각할 때가 좋았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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