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잘 알아야 여행도 재밌다!
몰타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본격 여행을 떠나기 전 생활 영어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었고 생각보다 치안이 안전했다. 어학원 선생님도 (잘생기고) 친절했다. 오랫동안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않은 탓에 친구를 사귀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좋은 아이들을 만났다. 한식에 맞춰져 있던 내 입맛도 짠 몰타 음식에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행복했지만 늘 꽃밭은 아니었다. 우울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한 없이 땅굴로 파고들게 됐다. 특히 가족이 그리워질 때가 심했다. 본가에서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던 대학생 때는 가족이 보고 싶으면 전화를 하거나 주말에 바로 달려가면 됐다. 해외에서는 시차 때문에 내가 원할 때 전화를 걸 수 없었고, 비싼 비행기표에 학원 일정에 한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해외에 나와있기로 결심한 기간은 3개월. 100일도 채 안 되는데 뭘 그렇게까지… 싶겠지만 일정이 짧으니 우울함은 더해져 갔다. 기간이 길다면 친구들에게나 가족들에게나 마음껏 칭얼거릴 수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뭐 미친 듯이 가족이 그립진 않았지만 조금은 우울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난 놀러 와서 너무 행복한데 우리 엄만 아직도 뼈 빠지게 일하고 있고.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었다.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워도 우울했다. 의외로 해외여행이 나한테 맞는데 만약 다시 나올 일이 없으면 어쩌지?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디지털 유목민)가 꿈인데, 또다시 회사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면? 아니 무엇보다 재취업을 못할 수도 있는데 어쩌지? 식으로 불행 문답은 계속되기 시작했다.
나는 회사 생활, 교우 관계에 트러블이 생기면 가족·지인들과 얘기하는 편이다. 나보다 경험이 많은 이들과 얘기하다 보면 크게 느껴졌던 문제가 별 것 아니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고,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할 때도 그냥 말하는 것만으로 풀리기도 했다. 해외에서는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 친구들과는 안부, 취향을 묻기에도 벅찼고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구들과는 좋은 얘기만 하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애들이 대부분 20대 초반이라 내가 칭얼거리기엔 조금 쑥스러웠다.
휘몰아친 우울에 대처하기 위해 내가 세운 계획은 이랬다. 내 감정에 너무 빠져지내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 하기. 로맨스 광인 나는 괜찮은 드라마와 영화를 미친 듯이 몰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에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콘텐츠는 모두 섭렵했고 계획은 처참히 실패했다.(해외에서 웨이브와 티빙은 서비스하지 않았다. 제발 해주세요)
그럼 다음. 술 마시기. 이건 그냥 패스했다. 필자는 애주가라 맥주, 와인을 마시는 걸 사랑한다. 특히 몰타에서는 와인에 푹 빠져지냈다. 와인이 1~2유로밖에 하지 않아 맥주보다 싸기도 했고 맛도 있었다. 하지만 술에 너무 빠져 지내면 다음 수업에 차질이 생기기도 했고 외국까지 나와서 술독에 빠져지낼 순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 듣기. 이 방법은 꽤 잘 통했다. 플레이리스트는 추억이 뒤섞여있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음미하다 보면 그때의 나로 돌아가 마음을 조금이나마 안정시킬 수 있었다. 가족들과 드라이브를 할 때 듣던 노래,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크게 부르던 노래, 페스티벌에서 듣던 음악. 이런 플레이리스트로 음악을 듣다 보니 내가 평생 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그만 청승 떨자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듯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하면 안정되는지 파악하는 건 타국에서 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 앞선 나의 경험처럼 불안함을 날리고 싶을 때 좋고, 또 하나는 ‘결정’을 내릴 때 삽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여행지에서는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곳을 갈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지 등이다. 물론 이런 선택은 여행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들 한다. 중요한 건 여행지에서는 실패를 할 시간과 돈이 ‘더’ 아깝다는 거다.
여행은 보통 기간을 정해놓고 하기 마련이니 시간이 한정돼 있다. 직장 다닐 때 점심시간에 메뉴 선택에 실패했다? 다신 안 먹으면 된다. 여행도 그렇지만 기분을 잡치는 폭이 다르다. 매 끼니를 사 먹다 보니 돈도 돈이고, 나름 어떤 메뉴를 고를지 살피고 찾았는데 실패한 나 자신에 대해 자괴감도 느낀다. 그래도 나름 내 취향대로 움직였다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 취향에 맞는 뷰를 선택했다던가, 내가 원하는 목적지와 가까운 곳이었다던가. 혹은 맛은 덜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던가 말이다.
이틀 연속으로 박물관을 갈지 아니면 카페에 가서 여유를 즐기고 싶은지 선택을 하는 것도 쉬워진다. 그저 랜드마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뚝뚝 떨어지는 체력에 여행 일정 내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뭘 하면 편안한지, 뭘 좋아하는지 나 자신에 대해 잘 알아둔다면 여행지에서 마음을 다스리거나 결정을 내리는 건 훨씬 쉬워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