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에서 시간은 참 빨리도 흘러갔다. 어학원에 적응하고, 꼭 가야 할 스팟을 돌아보고, 수영도 하고, 몰타 감기까지 앓고 나니 한 달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제 외국인이 갑자기 말을 걸어도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는 단계가 됐으니, 여행을 떠나도 될 때였다.
어디로 떠날까? 몰타는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스위스, 스페인 등과 인접해 항공료가 굉장히 저렴하다. 티켓값은 비싸봤자 편도로 십몇만 원 정도다. 가격이 저렴하다 보니 어디든 떠나도 부담스럽지 않은 셈. 동행하기로 한 N, Y와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여행지는 프랑스였다. 여행 일정을 고려했을 때 가성비 좋은 나라가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왕복 티켓값은 8만 원 정도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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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선택한 이유는 또 있다. 에펠탑, 바토무슈,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디즈니랜드. 다양한 랜드마크 덕에 취향이 제각각인 우리가 이견없이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여행 일정은 주말을 포함한 3박 4일. 몰타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사이였던 우리는 틈틈이 여행계획을 짰고, 오랜만에 만날 도시 풍경에 설레기 시작했다. 몰타의 에메랄드 빛 바다와 발레타가 보이는 슬리에마 야경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다.
파리로 떠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리자 반응이 두 가지로 갈렸다. ‘파리 좋지!’, ‘소매치기 조심해’. 어학원 선생님과 외국인 친구들은 파리에 볼 것이 많은데 여행 일정이 너무 짧다면서 맛집과 가봐야 할 곳을 추천해 줬다. 반면 한국 지인들은 소매치기로 유명하니 소지품 관리를 잘하라고 신신당부하더라. 눈 감고 코 베어가는 곳이 서울이 아니고 파리라나 뭐라나.
파리 여행 후기를 듣고 보고 난 후도 걱정이 되진 않았다. N의 지인은 파리의 지하철역에서 뺏긴 핸드폰을 다시 찾으려다 에스컬레이터에서 크게 넘어져 다쳤다고 했다. 유랑 카페에는 지하철에서, 몽마르트르에서 소매치기가 여권과 핸드폰을 모두 훔쳐갔다는 자세한 후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후기는 한국에서 몰타로 올 때도 많이 봐왔다. 몰타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글을 몇몇 봤는데 그런 일을 겪은 적도 없고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방을 의자에 걸어두거나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둬도 별일이 없었다. 물론 완전히 한국처럼 노트북을 두고 카페에 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파리 역시 가보면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마냥 유명한 그 파리!로 간다는 감흥에 도취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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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스레 겁이 나기 시작한 건 파리로 떠나기 하루 이틀 전부터였다. 그놈의 가정(假定)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스마트폰을 잃어버린다면? 몰타에서는 유로를 그날 환율로 충전해서 쓰는 트레블페이를 쓰고 있었다. 앱을 이용해 쓸 돈을 충전하니 폰이 없다면 큰일 날 일이다. 동행과 떨어졌는데 폰까지 잃어버린다면? 연락할 길도 사라진다. 거기다 여권까지 도둑맞는다면 어떨까. 3박 4일의 짧은 일정을 대사관을 오가느라 다 써야 할지도 모른다. 막막한 상황을 가정하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여행 전날엔 설레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잠 못 들었다. 내 성격도 참으로 이상하다 싶은 게 한국에서 몰타를 떠날 때도 그렇더니 닥치니까 걱정이 몰아쳤다. 지금 몰타에 생활이 익숙해졌듯 파리에서도 걱정한 만큼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귀중품을 안고 타야 할 공항버스, 백팩을 메고 타야 할 지하철. 모든 게 다 소매치기가 가득한 공간으로 상상이 됐고, 생각의 흐름은 ‘그냥 가지 말까’로 끝나기 일쑤였다.
‘치안이 이렇게 악명이 높은데, 비싼 돈 주고 마음고생을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계속 맴돌았지만 이미 몸은 프랑스행 비행기에 실려있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가정은 현실이 됐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아무 일도 없었다. 심지어 파리는 두 번 갔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여행지였고 소매치기는 마치 용처럼 상상 속의 동물이다 싶더라. (물론 사람 바이 사람이다. 필자는 괜찮았지만 여전히 파리는 소매치기 많은 도시로 꼽히고, 피해를 받은 분들이 많다. 조심 또 조심하는 게 가장 베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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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는 대부분 긍정적인 단어들이 붙는다. 설렘, 자유, 낭만, 휴식. 듣기만 해도 지루한 일상과 거리가 멀어 편안해진다. 비행기를 타면 꽃밭처럼 아리따운 풍경이 날 기다리고 끝내주는 음식을 먹고 다시 아쉬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올 것만 같다. 하지만 여행은 그렇지 않다. 떠나기 전엔 끝없이 걱정이 몰려오기도 한다.
당연하다. 마냥 즐거운 여행은 없다. 생각하건대 여행은 미지의 세계다. 보고 듣긴 했지만 나는 직접 가본 적 없는, 혹은 일상에 밀려 사진첩에만 둔지 오래돼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곳. 그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기보다는 설렘과 두려움 사이가 딱 적절한 것 같다.
여행 가기 전 두려움에 잔뜩 휩싸이는 타입이라면 그것도 여행의 과정 중 하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다만 여러분은 생각보다 똑똑하니 자신을 믿는다면 별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필자도 파리에서도 귀중품을 귀중하게 다뤘던 탓에 별 일이 없었다. 머리끈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다 쓴 까르네(교통권)까지 챙겨 왔더라.
필자처럼 잠들지 못할 정도로 걱정은 말았으면 한다. 돌아보니 소중한 여행 첫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 피곤함과 잠으로 날렸다. 오늘 걱정은 내일로, 가볍게 밀어버리시라. 잊은 소지품이 없나?도 그만. 여권과 스마트폰만 있다면 요즘 여행은 다 할만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해 여행을 망치지 마시길. 실체 없는 목표물에 섀도복싱을 하다 지쳐 나가떨어지는 건 자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