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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처럼 Mar 07. 2024

하야오가 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답한다, 허무를 껴안은 도넛처럼


‘당신들은 어떻게 살 건가?’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묻는다. 그 물음이 궁금하여 영화관을 찾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같은 이름의 1937년에 출간된, 아동문학가 요시노 겐자부로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의 내용과 영화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고 한다.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못함) 다만 영화 속에 책이 잠시 등장한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평은 반으로 갈라진다고 한다. 호평이든 혹평이든 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준 것만으로 고마웠다. 그렇게 자기 목숨을 갉아먹듯이 해서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 혹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어이없을 정도.

영화를 본 뒤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큐를 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영화와 다큐를 떼어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영화가 곧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 그 자체였다. 아마도 이뿐만 아니라 모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모두가 그의 삶 자체였으리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러나 이 세계에는 이미 없는 사람들에 대한 진혼과도 같은 이야기. 떠나보냈지만 쉽사리 떠나보낼 수는 없는 그리움과 애증이라고 할까.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아직 죽지 못한 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종종, 죽음이라는 것이 삶의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말을 통해 그것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삶의 한가운데에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 말이 비록 아직 살아있는 이들 혹은 관찰자들에게 맞는 말이라고 해도 적어도 죽은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죽은 이들에게 죽음은 삶의 끝,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은 엄연히 다르며 생과 사는 어떤 종류의 확언처럼 분명히 나뉘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년시절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마히토’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화재로 사망한다. 마히토가 어떤 힘에 이끌려 그 ‘이상한 세계’로 갔을 때 그는 소녀로서의 어머니를 만난다. ‘히미’라는 이름의 그 소녀를 물론 마히토는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두 사람은 다시 ‘생의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각각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가는 문. 히미가 자신의 그 생의 문, 운명의 문을 열려는 순간 마히토는 말한다.


“히미,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나중에는… 불에 타서 죽을 거야. “

히미는 마히토를 보며 정겹게 웃으며 말한다.

“괜찮아. 불 따위 두렵지 않아.”

그리고 히미는 힘차게 그 문을 열고 세계로 나아간다.

마히토 또한 그런 히미를 보며 자신의 생의 문을 열고 기꺼이 나아간다.



우리는 삶이라는 거대한 슬픔을 껴안은 채로 그것에 점령당하지 않고 우리가 열고 나온 문 밖의 세상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마치 도넛이 빈 동그라미를, 그 슬픔인지 죽음인지 명료하지 않은 부재를 온몸으로 껴안고 살아가듯이.

 

태어난 모든 존재들은 ‘죽음’에 깊이 매여있으며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모두 ‘사랑’에 매여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우리를 태어나게(존재하게) 하고 살아내게 하는 그 실체는 사랑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묶어둔 실보다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힘이 세며 훨씬 더 부드러운 형태의 실로 우리에게 묶여있다. 당신이 문을 열고 나온 그 세계가 어떤 운명의 빛깔을 띄고 있건 우리라는 빈 존재는 사랑에 묶여 이 삶을 살아간다. 그 허무의 동그라미를 껴안은 도넛처럼.


​너무 늦기 전에 마음을 정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이 생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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