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빈둥빈둥적당히빠르게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 이런 문장이 있다.
소설뿐이겠습니까. 장편영화이자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장편 다큐멘터리, 서사시, 장편 드라마 등등 갖다 붙이면 한둘이 아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자기 인생에서 주변인은 아닌 것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장편소설. 그것이 인생.
세상에는 인기 있는 소설이 있고 인기 없는 소설이 있으며 재미있는 소설이 있고 재미없는 소설이 있다. 의미 있는 소설이 있고 의미 없는 소설도 있다. 주목받는 소설이, 영원히 읽히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소설도 있다. 누구나 주목받고 영원히 읽히고 싶지만 마음과 현실은 다른 것처럼. 다만 어떤 인생도 의미 없는 인생은 없다는 점이 소설과의 차이 아닐까.
뜬금없이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렸다. 그는 평생도록 그림을 그렸지만 생전에 그의 작품과 화가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다들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마저 그의 화가로서의 전설적 스토리니까. 심지어 살아있을 때 단 하나의 작품만 팔렸다고 한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사후 15년 만의 일이었다고 나와있다. 소설가로 치자면 평생 소설만 써온 어느 소설가가 단 한 번도 주목받지 못하고 죽었고 그가 죽은 뒤 십오 년 정도가 지난 다음에야 누군가가 그의 글을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그다음에는 급기야 그의 소설들이 전세계인들이 읽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게 된 상황인 것이다.
그의 작품도, 그의 인생도 살아있는 동안 비참한 평가를 받았을 뿐. 고흐의 인생의 무게가 녹녹지 않았음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총체적으로도 … 그리하여 그의 최후는 익히 알려진 대로 그렇게 슬퍼야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순간’ 만큼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하지 않았을까. 모든 일상의 잡다함과 생존의 압박과 정신적 피폐함의 순간들이 말끔히 물러가고 오직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큼은 거기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사이프러스를 그리며, 해바라기를 그리며,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그 아래 풍경을 그리며 그는 현실을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오직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몰입하며 그 기쁨을 누렸을 것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만약 그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림을 그렸다거나 평범한 인생을 살며 그림을 그렸다면 영혼을 뒤흔드는 그의 그림들은 탄생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만일 내 인생에 대해 거래를 제안받는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까. 30대가 넘으면 보수가 된다는 말처럼 30대까지는 불꽃처럼 타는 뜨거운 인생을 살다가 멋지게 죽고 싶었겠지만 40을 넘으니 아 그렇게까지는 좀…이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 MBTI 성격테스트처럼 ‘느긋하게 빈둥빈둥 적당히 빠르게’의 추구 정도를 테스트한다면 아마 나는 딱 중간자로 나올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일을 할 때는 그 태도를 취하기 쉽지 않으나 평소 태도는 그렇다.
느긋하게 빈둥빈둥 적당히 빠르게의 정신으로, 내게 주어진 이 장편소설의 페이지들을 채워나가련다. 아마 반고흐적 인간이 될 수는 이미 없을 듯하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앞으로의 스토리 라인은 쪽대본이라 전혀 모르겠지만.
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