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삼계탕집엘 갔다. 조석으로 선선한데, 한낮은 아직 여름날씨이기에 하루에 두 계절이 존재하는 이 괴이한 현상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자리 박차고 일어나 달려갔다.
그렇구나. 계절도 말 못 할 미련이 있구나. 사람과 계절이 함께한 지 수억만 년 일 텐데 그 애달픈 미련 하나 못 달래 주겠느냐. 계절에게 이런저런 혜택을 받기만 할게 아니라 이제 계절의 마음을 인간이 살피고 보살펴야 할 때다. 여름 절기 중 초중말복, 뜨거운 삼복에 올해는 플러스알파를 추가해야 한다. 유난스러운 올여름에 조심스럽게 절기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졸복!" "이제 졸업하자. 여름아. 제발."이라는 의미다.
올여름만 반짝 생색낼게 아닌 듯싶다. 내년도 앞으로도 여름은 갈수록 뜨거울 테니, 그러니 급변하는 세상에서 생각해 볼 일은 전통의 변화다. 미국 현대철학자 월리엄 제임스가 표방한 근본적 경험론 (radical empricism)에 입각한 탄탄한 논거다. 24 절기에서 이제 25 절기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추분과 한로사이가 어떨까?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하다가 바로 관두고 냉큼 시선 돌려 초록창에서 절기를 검색해 본다. 깜짝 놀랐다. 삼복은 24 절기에 포함되지 않은 잡절이란다. 나만 몰랐던건가?
"아이구... 이런... 삼복은... 잡절... 이라니."
이제야 알겠도다. 여름이 잔뜩 심통 난 이유를. 삼복은 절기들 중에서 비주류였고 마이너리거였으며 별 볼 일 없는 변두리 절기였던 것이다. 24 절기를 우리네 조상님들이 다 생각이 있고 뜻이 있어서 제정하고 세팅하셨겠지만, 삼복을 제외시켰다니 그 이유가 사뭇 궁금하기도하고 우선 왠지 여름에게 미안해진다. 왠지 마음 쓰이고 애착이 가니 같은 비주류, 변두리거로서의 공감대이려나.
디폴트로 제공되는 인삼주 한 잔으로는 술꾼의 예의가 아니니, 이모. 여기 이즈백 일병 추가요. 섭섭해하는 여름에게 따섭호섭은 술 한잔 넉넉히 올린다. 여름이 한잔 하며 가만히 지켜보니, 기본적으로 이 인간, 따수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단지 낮술 한잔 하려고 괜히 이러는 건 분명 아닐 듯싶다.
24 절기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지 못한 삼복과 새로이 '졸복'을 추가하여 나만의 절기수첩에 기록한다. (이모. 여기 독창성 지수 일점 추가요) 심통 난 여름을 달래고 섭섭함을 알아봐 주니, 여름이 끄덕인다. 이제 미련 없이 갈 수 있겠다고. 알아봐 줘서 고맙다며 술 한잔 따르며 선선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호라, 인간도 계절도 자신을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오며 가며 그럭저럭 살 만한 세상일 지어다.
어느 훗날, 역사학자들은 이 사실을 찾아내고 기록하리라. 24 절기가 28 절기로 바뀐 역사적인 그날을. 계절과 내통하는 한 인간이 그걸 밝혀냈다고. 그 인간이 누구냐고 조사해 보니 새벽을 거닐고 문장을 노니는 문학소년이란다.
새로운 단어의 창조와 시와 때의 미세한 떨림, 계절의 마음마저 알아채고 문장으로 아우르는 자. 분명 초보인데 좀 희한한 이 인간, 자기 스스로도 가끔 화들짝 놀라며 내심 자꾸 궁금해 하는자. 이 인간. 마음 쓰는 자. 작가임에 틀림없다.
졸복의 의식을 경건히 치르고 사나흘이 지난 오늘.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의 결이 선선하다. 여름이 보내온 작별인사인가 싶다. 그래. 안녕. 여름아. 잘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