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여 유희강. 추사 이후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는 서예거장.서예에 조예가 깊을 리 없는 나는 이 분의 존함과 작품 세계를 당연히 알지 못한다. 단지, 한 문장. "붓으로 세상을 베다." 이 문장에 취해 혼이 나간 사람처럼 전시관에 들어섰다. 강렬한 문장만큼이나 선 굵은 작품들이 공간을 압도한다.
한자 세대인지라 글자의 음들은 대략 읽을 수 있으나, 작가의 깊은 뜻은 한치도 헤아릴 수 없이 깊고도 멀다. 게다가 휴일 오후 관람객들이 밀려 들어오니 손도 바쁘고 눈도 바쁘다. 일단 사진으로 남기고 나중에라도 찬찬히 들여다볼 요량이다. 느긋한 문화생활을 했으면 참 좋으련만.
연오정. 어르신들이 담소도 나누고 자유공원의 새와 냥이들, 월미도의 거센 바람마저 쉬어가는 아담한 정자다. 여기 현판을 검여 유희강 선생이 쓰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사실 허탈하였다. 매일 보는, 그것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그것도 무려 칠 년 넘게 마주해 온 현판 앞에서 이 사실을 못 보았다니. 공원의 문장이란 문장은 모조리 알고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역시 허당 김호섭답다. 곤충의 눈과 새의 시선으로 길위의 인간과 세상을 보고 관찰하며, 문장을 수집하고 마음에 기록하자던 소년은 <길 위의 문장들>
이라는 자신의 현판 앞에서 머리 숙여 반성의 시간도 가져본다.
좌수서. 반실불수의 중병으로 고생하시던 검여는 왼손으로 붓을 잡고 다시 예술가의 혼을 불태우셨다는 소개글을 보고 허당은 가슴이 쿵 내려 앉았고, 그제서야 선생의 작품들이 다시 깊게 보이기 시작했다. 뇌졸중이셨을 터.
1911~ 1976. 말년에 선생은 평안에 이르셨을까?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더니 무음처리되고, 밀려드는 관람객들의 동작이 슬로비디오로 움직이다가 멈춘다. 시간과 공간이, 검여와 허당이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다. 서로 너무도 멀고도 가까이 다른 세계에 있던 고수와 초보 사이에 가느다란 선하나가 연결된다.
이렇게 어느 한 마음이 왔다. 동질감 또는 먹먹함이 손잡은 길에서 새로운 관계는 시작된다.
제물포구락부를 나와 연오정 앞에 선다. 검여 유희강. 붓으로 세상을 베고 사랑을 남기고 간 작가. 칠 년이 넘도록 선생이 나에게 말하려 했던 뜻은, 내가 방치하고 외면했던 마음은 무엇일까. 나의 문장은 무엇을 베고 무엇을 남겨야 할까. 일 년이 넘도록 써 온 왼손필사. 이 길의 지나온 운명과 예정된 미래는 무엇인가. 질문의 답도, 숲의 가을도 곧 깊어지겠지.
연오정에 합장 올리고 방구석으로 돌아온다. 왼손의 움직임이 어제와 다르다. 연습장에 한 문장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