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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섭 Oct 11. 2024

마침표와 느낌표


요 며칠 사이에 몇 가지 마침표를 찍었다. 무엇인가 매듭짓는 이 마음은 홀가분하다가도 뿌듯하더니 살짝 헛헛하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 미묘한 마음을 다잡아 단순화하려 애쓰지만, 인생 수련이 덜 된 나는 은근 슬쩍 이슬의 힘을 빌어 보고자 대낮에 홀연히 생맥주집에 들어선다. 이슬을 만나려면 포차를 가야지 웬 호프집이냐 어리둥절 거리면서.

네가 언제 주종과 장소를 가려가며 마셨느냐 타박하면서.

참으로 대책도 물색도 없는 허당 김선생답다 중얼거리면서.




약 보름간 고통을 주던 감기 몸살에 마침표를 찍었다.

간절기마다 찾아오는 이 녀석의 출현과 소멸은 자의라기보다는 절기와 약의. 계절과 약의 뜻이 컸으리라. 존재론에서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결정론'에 가깝다.

한글날을 앞두고, 몇 푼 안 되는 (책 판매) 인세로 친구들에게 주세 (술값)를 흔쾌히 쐈다. 이 행동은 책 쓰기 전부터 나름 야심 차게 계획해 온 프로젝트다. 늘 신세만 지던 친구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답하는 차원이니,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당연히 "고맙다 브라더스" 이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는 분명, '자유의지'다. 세상에나 기쁜 마침표이다.

35년 차 직장인 나부랭이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연말 즈음에나 정년이겠지만, 회사 경영 환경 악화로 한 두 달 앞당겨 짐 싸고 나왔다. 5년 넘게 유일한 사무실 동료였던 경리과장이 울먹 거릴까 봐, 감성지수 만랩인 난 또 글썽일까 봐, 감사의 쪽지 하나 남기고 그녀 출근 전에 회사 정문을 나섰다. 그제야 알았다. 회색빛 다크 그레이 천지였던 공단의 하늘도 이렇게나 푸르렀구나.

파란만장 죄충우돌 35년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긴 어렵겠지만, 요약요정인 나는 문득 시도해 본다. "감기 몸살 같은 것". 눈물 콧물 몸살 재채기 지독히도 오래도록 정신없이 혼을 쏙 빼다가 어는 한 날, 하루아침에 어라? 정신 차려보니 그런대로 멀쩡하니 의아해지는 일. "감사한 시절들".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꾸역꾸역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그 시간들에 화들짝 놀라는 일.  그 세월의 무게에 버거워하면서도 그래. 마땅히 감사한 일.


그러니 이것은 공(空)의 세계.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무념무상. 해탈과 중도의 세계이려나. "마음 다스리는 수행의 길"이라 덧붙여 정의해 본다. 버겁고 괴로웠던 건 어느 누군가 때문도, 빡센 일과 회사 때문도, 까칠한 고객 때문도 아니었다는 걸 알아가는 길. 하루에도 열두 번씩
흔들렸던 건 오로지 내 마음뿐.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헛헛함이 평안에 이르니, 육조 혜능의 말씀에 이제야 합장을 올린다. (참고로, 난 프란체스코다. 성당오빠다. 종교와 철학의 경계를 제멋대로 넘나드는 흔한 동네 아저씨다.)




호프집 TV화면에 온통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뉴스가 가득하다. 내 딸, 내 동생은 아니지만 나는 속으로 울었다. 더 이상 대한민국이 문학의 변두리가 아니라는 호쾌한

선언이며, 세계 문화의 중심에 한국문학이 우뚝 서게

된 장쾌한 쾌거다. (하루끼 상에겐 좀 안된 일이지만...)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무거운데 세상 미려한 그녀의 문장들. 너무도 섬세한 리얼리즘과 이세계(異世界) 환상이 겹치는 오묘한 느낌을 기억한다.  브라운관 속 그녀는 수없이

밀려드는 모든 기자회견을 일절 마다한다. 온 세상이 전쟁이고 죽어가는 사람 천지인 시절인데 무슨 잔치냐.

아... 아제아제바라아제. 그 부친에 그 딸이다.


 시대의 아픔과 트라우마를 다독이며 산문을, 소설을, 시처럼 써 온  그녀의 노벨상. 이 선명한 마침표는 나에게 마침내 느낌표로 저벅저벅 큰 발자욱으로 다가온다. <흰> 눈밭의 발자국은 맞아. 느낌표 모양이었어. 슬그머니 나의 마침표에 느낌표로 이어가 본다. 내 35년의 마침표를 세상 헛헛해하거나 너무 씁쓸해하지 말지어다. 어쨌거나 새털같이 오랜 시간 배우고 일하며 아이들 키우고 또한 먹고사니즘을 해결해 주었으니 그거면 된 거다. 그 느낌표는 힘겨웠던 지난 시절을 이제 그만 놓아줘도 된다는 깨달음의 시그널이겠으니 이제야 나는 속세 떠난 스님 마냥 홀가분해진다. 이러다 득도할라. 아미타불 관셈보살이다.



마침표를 새롭게 정의하니 분명 오늘은 좋은 날이다. 마음 정리 되었으니 마땅히 나는 지금 성큼성큼 꽃집으로 간다. (문학) 소년이 (꽃 들고) 온다. 절절하게 애써온 시간의 보상은 꽃 한 송이, 이슬 한 잔의 소박한 상이면 충분하다. 가을에도 이슬은 맺히고 장미도 피는 법.

그래. 애썼다.


청춘은 어데가고 덩그러니 노을을 마주하지만

아직 끝난게 아니다.

한강의 잔잔한 물결을 월미도 앞바다에서 만난다.

다시 새로운 시작이 스미듯 한강과 서해가 겹친다.


그녀의 다음을 힘차게 응원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무언가 쓰고 있을, 쓰려고 홀로  애쓰는

이 나라 이 땅 글벗들의 다음도.


나의 다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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