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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기의 딜레마

by 김호섭



한 달 전부터 봄이 왔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그런데 어제 폭풍 불더니 오늘 눈 온다. 폭설 온다. 누가 뭐라고 탓하진 않지만, 나는 살짝 민망하였다. 그렇다고 도로 겨울이라고 정정보도하며 방방곡곡 다시 떠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랬다가 금세 다시 날이 좋아져 따사로우면 나는 민망하다 못해 완전 폭망 뻘쭘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봄이 왔다고... 아니 아직 겨울이려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을 우리는 딜레마라고 한다.




매해 봄이 올 때마다, 박인희 가수님께서는 <봄이 오는 길>에서 이렇게 노래하신다. "산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라라 라 라라라라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어차피 찾아오실 봄손님이기에 라라 라 라라라라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고 산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들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아름답고 따스하니 다 좋은 노랫말인데 "어차피"에서 자꾸 걸린다. 어차피라니요.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어차피 찾아오는 봄 손님이라니요. 하얀 새 옷 입고 분홍 신 갈아 신고 어렵사리 오시는데 '어차피'는 너무 무성의한 응대 아닌가요. 마당에 와 있는데 쳐다도 안 보고 "왔어?" 하는 그런 심드렁이라니요. 그래서 나는 '어차피'를 '기어이'로 바꿔서 부르고 환대하련다. 그 혹독한 겨울, 고생 고생해서 기어이 이기고 돌아오시는 봄님이니 말이다.

노래를 (옹알거리며 속으로) 한참 부르고 있는데 눈 온다. 폭설 온다. 아뿔싸! 박인희 선생의 노랫말씀이 맞았다. "어차피 찾아오실 봄 손님이니, 눈 오고 춥다고 호들갑 좀 떨지 말고 진득하니 좀 기다려라. 이 녀석아!"라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아이쿠야. 바로 깨갱이다.

이 노랫말씀은 분명히 수십 년 전 꽃샘추위 맹렬할 때, 시절이 어수선할 때 만들고 부르셨으리라 상상과 확신을 해 본다. '어차피'는 심드렁한 응대라기보다는 올 것은 꼭 오고야만다는 단호한 믿음을 지닌 자의 든든함에서 흘러나온 부사였다.

우리네 삶에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정한 삶의 간절기. 그럴 때에는 우리 함께 노래 부르자.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자. '기어이'는 뭔가 두 손을 꽉 쥐어야 하는 다소 무거운 모습이고, '어차피'는 해탈에 가깝다. 오호라. 대한민국의 간절기에도 적용해 보자. 이젠 그래도 될 듯싶다. 온 국민이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 어차피 오실 우리의 봄이라 생각하니 펄펄 날뛰던 혈압도 좀 내려간다.




겨울과 봄 사이. 간절기의 딜레마에 빠져 허덕이던 나는
'어차피 오실 텐데 뭘...' (중얼거리며 슬며시) 인파 속으로 총총 스며든다. 하늘 한 번 쳐다본다.

"눈꽃 참 예쁘게 오신다."
나는 눈을 보면서 봄꽃을 본다.

그만하자. 이러다 진짜 득도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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