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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유 Mar 17. 2024

나는 원래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만의 놀이터 그리고 '미술학원'

ㅣ영어유치원을 보내야 할까?ㅣ

 

올해, 첫 째 딸 L이 6살이 됐다. 

아이들은 놀면서 크는 게 정서상 좋다는 나름의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 부부다.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지금껏 교육에는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다.


"그저 건강하게 자라라는 마음,,,
같이 책을 읽으며

 책을 좋아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비교'라 했던가. 아내의 절친이 영어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기 시작했다.


"여보, 내 고등학교 친구 M 알지? 걔네는 이번 3월부터 영유 보낸대. 아무래도 영어는 일찍 배워야 귀도 말도 트인다는 것 같아..."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아내의 말들이 어느 순간, 나에게도 왠지 모를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첫 째 L은 아내의 '미니미'다. 

세상에서 엄마와 아빠를 모두 좋아하긴 하지만, 엄마를 쪼끔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

무엇보다 아내의 훈육 매뉴얼에 길들여져서인지 행동할 때마다 엄마의 눈치를 볼 때가 많다.
(아빠 입장에선 K-장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벌써부터 짠한 마음이 든다)


웬만하면 엄마의 말을 따르는 L이지만, 타협이 안 되는 게 바로 '학원 문제'

영어유치원에 대해 한창 고민할 때 영어학원부터 우리는 먼저 보내기로 했다.


오리엔테이션까진 흥미를 느끼던 딸은 본격적인 학습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학원 가기 싫다면 떼를 쓰기 시작했다. 몇 차례 학원도 옮겨보았지만 한 두 번만 흥미를 느낄 뿐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결국 우리는 L의 영어유치원 보내기를 포기했다. 


L이 좋아하는 딱 하나의 학원이 있다. 바로 '미술학원'

"왜 다른 학원은 싫은 데 미술학원은 좋은 거야?"라며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음... 미술은 재밌잖아!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아내는 애들 미술학원은 학원이라기보다는 '놀이터'라 표현하며.. 아이들 중에 미술학원 싫어하는 애들은 드물다고 얘기해줬다.



ㅣ나의 놀이터는 무엇일까?ㅣ

요즘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내게 아내의  '놀이터'란 표현이 크게 와닿았다.


"대체 나에게 놀이터는 뭘까?"


지금껏 난 일이 제일 재밌었다. 

"남들이 왜 늦게까지 일하냐고, 너무 힘들지 않냐?"라고 물어볼 때조차 가볍게 웃어넘기곤 했다. 

그래서 지금껏 난 일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착각'이었다. 

물론 일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었지만, '일'은 온전하게 내게 '놀이터'와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었다.


일은 재미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일이 잘 될 때는 스스로 자신감과 여유가 넘치다가도,
일이 안 풀리기 시작하면 퇴근해서도 생각나고..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다.

30대 초반까지는 이 '고통' 역시 성장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감수하며 지냈는데... 

켜켜이 쌓인 고통이 임계점을 넘어가서인지 몸에 이상신호가 하나둘씩 감지되기 시작한다.


일 자체로만 '나'를 정의하는 게 아니라, 

삶 전체로서의 '나'를 재정의하는 아니, 재창조해야 하는 상황이 필요했다.




ㅣ오늘부터 미술학원에 다닙니다ㅣ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미술이었다. 

재밌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미술은 한 동안 내 머릿속에는 전혀 없었던 '키워드' 중 하나다. 


하지만 '중년의 위기'를 겪으며 관심사가 변하기 시작했다. 

독서도 기존에는 경제/경영 기반의 실용서 기반의 책들만 편식했는데, 철학/인문학/심리학 서적에 관심이 부쩍 늘었다. 

"Chat-GPT로 촉발된 오픈 AI 생태계 변화란 지식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다.

미술도 변화의 연장선이었다. 미술 책을 읽을까, 직접 미술을 배워볼까 고민하다 결국 학원을 등록했다.

집 근처 미술학원 중 한 곳이 다행히 성인 미술도 진행가능하다고 해서 당일 바로 '등록'했다.


아무리 미술을 배운다고 해도 DNA는 변하지 않았던 터.
원장 선생님께 한 달 걸리는 기초 코스를 1주 만에 끝내자고 나름의 Deal(?)을 완수하고 뿌듯해하며 미술학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주변에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하면 아이들이 다니냐고 처음엔 물어본다.

그러다 "제가 다니기 시작했어요"라고 하니 다들 "네가?!"라는 놀라운 반응을 쏟아낸다. 

이런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소소한 재미 포인트 중 하나다.


드디어 첫 째 날. 미술의 기초자체가 없어 첫날은 '선 그리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선 그리기가 별 거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만만하게 덤볐는데. 생각 외로 손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갓 개업한 원장님은 처음에는 다 이런 거라며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신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칭찬을 받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갑자기 글을 쓰고 있자니 서글퍼진다)


"소질이 있으시네요", "잘하고 계세요"라는 선생님의 리액션에 마음이 정화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짧게만 느껴진 1시간 30분의 레슨 시간 끝.  

 

워커홀릭이었던 내게도..
'드로잉'이라는 새로운 '놀이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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