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학창 시절이 기억난다.
"나는 아버지가 기업 사장이셔. 너는?"
"나는 아빠가 의사인데, 넌 우리 말만 듣고 잠자코 있네?"
그들은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신문 일을 그만두시고 철강사 일을 하셨고, 친척들이 의사, 대령, 교수 등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이 허름해서다. 내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은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직업을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철공소 직원으로 둔갑시켜 버렸다.
겸손함이 마침내 그들에겐 상종하기 꺼려워 하는 동료로 변한 꼴이다.
그들은 그후 서서히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학업으론 그들 위에 섰지만, 나는 부유한 그들이 도와줄 가난뱅이로 여겨졌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선 돌아가신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도,
집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이런한 가치들과 다퉈야 한다.
가뜩이나 허무하고 회의로운 세상에 그들 눈치를 안 보기도 어렵다. 서글픈 세상이다.
세상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쇼맨 영화에선 가난하고 특이한 이들을 도운 사람은 정작 같은 처지의 가난한 이들이다.
부자가 아니였다.
빵 하나 먹고싶어 훔친 가난한 이는,
세상에 내 던짐을 겪는다. 법적인 판단만 작용해서다.
삶의 의미는 안 중에도 없다.
이때, 배고픈 이에게 가난한 이가 사과 하나를 넌지시 준다.
부자들이 주는 게 아니였다.
양극화 세상은, 공감 위안이 아닌,
법 테두리로 제단한다.
막스 베버는 경제적 지위에 한 술 더 뜬다.
사회적 지위 등으로 계층 우위를 점한 논리를 피력한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부자가 가난한 이들을 돕고 공감하는 세상을 꿈꿔 본다.
정치와 돈 논리 위에, 공감의 논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