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가면 끝까지 갈 수 있다
30분 이상 의자에 앉아 있기가 힘들어졌다.
고질병인 허리디스크 증상이 다시 심해진 것이다. 작년에 시술을 받고 조심하며 살아왔는데, 요즘 방심했나 보다. 일이 바빠 야근을 계속하면서,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1시간에 한 번씩 자리에서 일어나 하다못해 화장실이라도 왔다 갔다 했는데, 그것마저도 안 한 지 오래다. 사무직의 운명상, 어쩔 수 없이 앉아서 엉덩이 힘으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계속 앉아 있으면 허리와 무리가 가게 마련이다. 짬을 내서 산책은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허리 통증은 골반과 다리로 퍼져 나가, 온몸이 제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걸을 때 왼쪽 다리가 찌릿하기도 하고, 누가 불러 돌아볼 때마다 골반이 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목까지 영향이 있었는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 허리가 아파 '헉'소리가 절로 나왔다. 올 초 사무실에서 동료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다가, 허리 디스크로 구급차에 실려간 팀원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고, 특히나 시술은 더 이상 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데(벌써 4번째다), 어떻게 하면 증상이 완화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속가능한 방법을 고려해야 했다.
허리 시술을 받고는, 통증이 없어져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의사 선생님의 경고는 몇 달이 지나니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이 자세로 계속 살면, 평생 누워서 살 수도 있다며 화를 내실 정도로 안타까워하셨는데...
다시 아파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참 간사하게도 괜찮을 때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래서 일회성 치료가 아닌, 혼자서도 계속할 수 있는 운동을 하려고 집 근처 필라테스 강습소를 찾았다. 내 몸을 자세히 관찰하신 원장님은, 시술을 담당했던 의사 선생님과 비슷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이렇게 살다가는 정말 큰일 나요'라고 눈빛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건강을 돌보지 않은 자가 받는 중간점검 같은 느낌이랄까. 혼날 각오를 하고 제발 살려달라 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어떠한 충고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이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는지, 끝까지 친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허리 상태가 심각해 무리해서 운동을 하지는 말되,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실천하라 했다. 그중 이번 주 숙제는 '계단 오르기'였다. 허리를 받쳐 주는 골반 근육이 없는 상태라, 계단을 오르면서 엉덩이 근육을 만들면 된다고 했다.
"집이 몇 층이에요?"
원장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 집은 22층인데, 절대 그건 내 다리로 못 올라가겠고, 대신 사무실이 10층에 있으니 도전해 보겠다고 말했다. 내 답에는 자신감이라고는 단 1%도 없었다. 평소 회사에서도 여러 개 층을 다니며 회의할 일이 많은데, 단 2개 층을 걸어서 올라가는데도 헉헉대는 저질 체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22층은 언감생심, 10층도 무지 고민되는 수치였다.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이성의 영역이었다. 감성의 영역은 '힘들겠다'라는 마음으로 가득 차, 시작하기도 전에 무서워졌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고 힘들다고 징징댈 수는 없으니, 일단 도전은 했다. 운동이 끝난 후 집 지하 2층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애써 엘리베이터를 외면한 채 계단으로 향했다. 목표가 10층이니, 거기까지만 올라가고 힘들면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이었다. 사실 시작하기도 전에, 힘들어 때려치울까 봐 걱정부터 했다.
아무튼 한 발자국씩 올라가는데 신기하게도 5층까지 숨차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목적지인 10층에 도착했더니 '어라, 괜찮은데? 조금만 더 올라가 볼까?'라는 예상치 못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 집인 22층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왔다. 감격에 겨워, 얼른 이 사실을 사돈에 팔촌까지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니,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다. 평소 내 체력과 정신력이라면 꿈도 못 꾸었을 텐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속도'가 답이었다. 계단을 의식하며 한 발, 한 발씩 천천히 내디뎠을 뿐이다. 아직 체력이 쌩쌩한 초반에는, 빨리 올라가서 숙제를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이렇게 가면 10층을 다 못 채울 것 같았다. 억지로 천천히 천천히를 강조하며 올라갔다. 음악을 틀고 리듬에 맞춰 한 걸음씩 가다 보니 어느새 22층이었다. 사실 나조차도 놀랬던 건, 22층에 도착해서도 몇 개층을 더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남편과 산책을 할 때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발 천천히 좀 가. 그렇게 가니 오래 못 가고 빨리 지치는 거야."
자기는 산에 뛰어다니면서, 나랑 산책할 때마다 저렇게 말하는 그가 사실 얄미웠다. 일주일에 한두 번 하는 유일한 장거리 산책 시간이라, 운동량을 늘리기 위해 빨리 걷는 건데,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공원 같은 평지라면, 빨리 걸어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만 보 산책을 마칠 때쯤이면 매번 다리가 후들거리거나 무릎이 아프긴 했다. 처음으로 계단 22층 오르기를 하고 나서, 그가 말한 '천천히' 간다는 의미가 제대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빨리빨리'에는 끝이 없었다. 지난번에는 이틀 만에 했으니, 이번에는 시간을 조금 더 줄여 하루 만에 해오라고 했다. 나 혼자 못하면, 시간을 단축시켜 줄 수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동원했다. 일에서 추구해야 하는 의미나 질적인 면은 무시된 채, 빠르게 더 많은 것을 해내야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나의 일을 끝내고 나면, 아니, 끝내기도 전에 다른 일을 다시 해야 했다. 일의 강도는 높아졌고, 요구하는 속도는 빨라졌다. 나도 모르는 새, 번아웃이 찾아왔다. 비단 나뿐만이 아닌,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팀원들에게도 그 기운은 퍼졌다. 매번 최선을 다했지만, 보람 있는 결과를 다 같이 축하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공허했지만 애써 무시한 채 일은 계속했다. 이윽고 바쁘다는 말이 모두를 지배할 무렵, 서로의 얼굴에서 감정과 표정이 없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다가, 산책을 하다가, '천천히' 간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빨리 가면, 빨리 지친다. 그러면 가다가 아예 주저앉거나 포기하게 된다. 빨리 가는 그 길에서 만나는 낭떠러지를 인식도 못한 채, 정신없이 가다가 그대로 추락할 때도 있다. 그러나 토끼와 경주했던 거북이처럼,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간다면, 끝까지 지치지 않고 갈 수 있다.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지지만, 이럴 때야말로 멈춰 서서 생각할 때다.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걱정이 되는가. 아마도 남들과의 속도 경쟁에서 밀릴까 봐, 그냥 달리고 있는 것일 테다. 성공가도를 달리려면, 걸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천천히 가도 괜찮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이다. 오히려 천천히 가야 끝까지 갈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올바른 방향을 향해, 천천히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자신만의 북극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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