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뻘뻘 흘리며 먹어야 제맛
나열된 이 음식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부드럽다, 바삭하다, 달콤하다, 짭짤하다, 후루룩 잘 넘어간다?
그 어떤 맛에 대한 형용사를 동원해 봐도 쉽사리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육아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쉽게 눈치채셨으리라 생각된다. 정답은 바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것. 폭신하게 말린 계란말이, 갈색으로 잘 튀겨진 돈까스, 소고기를 넣고 푹 우려낸 미역국 등은, 아이 반찬의 스테디셀러다. 채소를 싫어하는 아이라도, 잘게 썰은 당근과 호박이 들어있는 고슬고슬한 볶음밥은 잘 먹는다. 잡채는 어떻고. 투명하고 신기하게 생긴 달콤 짭짤한 당면의 맛에 아이들은 환호한다. 물론, 이런 음식들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이 맛있는 음식들을 매일 먹으면 어떨까?
실제 우리 집 식탁도 그렇다. 아이가 좋아하는 반찬이란, 매번 거기서 거기다. 맛의 변주를 줘봤자, 돈까스가 아닌 치킨까스나 치킨너겟으로 바꾸는 정도? 분명 맛있긴 한데, 이런 것들만 주야장천 먹으면 밍밍해서 쉽게 물린다. 중간중간 김치를 먹으며 자극을 추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다른 맛이 간절해지곤 한다.
그것은 바로, 일명 '어른의 맛'이다. 어른의 맛이란, 아이들이 좋아하는 맛의 반대선상에 놓여 있다. 생굴을 먹으며 달콤하다 느끼는 것, 삭힌 홍어에서 감칠맛을 찾는 것, 순대와 곱창의 구수함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맛있다고 말하는 것, 쌉싸래한 맥주에서 은은한 감귤향을 느끼는 것, 부드러운 연어회의 기름진 맛을 즐길 수 있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아이들은 절대 모르는, 커가면서 눈을 뜨게 되는 어른들만이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맛의 종류이다.
주관적인 기준으로, 어른의 맛 중 최고봉은 바로 '얼큰한 매운맛'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아직 어릴 때는, 식탁에 김치 빼고는 매운 음식을 올려본 적이 거의 없다. 아이 반찬과 어른 반찬, 두 가지로 나눠서 밥상을 차리자니 너무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는 '맵찔이'임에도 불구하고, 늘 매운 음식을 그리워했다. 맑갛게 끓여진 소고기 뭇국도 맛있었지만, 경상도식으로 소고기, 무뿐 아니라 고춧가루와 대파가 듬뿍 든 빨간 뭇국을 먹고 싶었다. 간장 넣고 짭짤하게 조린 안동찜닭 말고, 시뻘건 양념으로 푹 조린 닭볶음탕을 먹고 싶었다. 팔팔 끓는 감자탕, 양념장 듬뿍 얹은 쫄면, 윤기 흐르는 제육볶음, 매운맛 신라면 등 이 세상 매운 음식이 모두 떠올랐으나 쉽게 먹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라면도 '진라면 순한 맛'밖에 없었다) 외식을 해도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 위주로 골랐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중국집에 가서 아이는 짜장면을 시켜주고, 우리는 짬뽕 국물을 들이키며 위안을 삼았던 정도?
지난 주말 남편과 둘이 충남 공주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여기저기 신나게 싸돌아다닐 생각으로 갔는데, 하필이면 날씨가 이상 고온으로 뜨겁고 허리가 아파 잘 걸을 수도 없었다.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즐거움을 발견해야 했다. 원래 놀러 가는 목적의 반 이상은 바로 먹을 것이 아니던가. 시원한 카페에 앉아 맛집을 검색했다. 나는 종종 이때 지역명에 '현지인' 혹은 '토박이' 등을 넣곤 하는데, 다른 맛집 결과보다 광고성 글일 확률이 적어진다. 여기에다가 '향토음식'까지 추가하면, 그 지역의 특산물로 만든 음식을 발견할 수 있다. 밤으로 유명한 공주 음식들은 이미 먹어봤기 때문에, 무언가 공주에서만 먹을 수 있는 다른 것을 계속 찾아봤다. 그러다 우연히 '매운탕'이라는 메뉴를 발견하고, 바로 이거다 싶었다. 아이가 없는 단둘이 여행의 목적에 딱 맞는, 어른들의 음식 말이다. 아이와 함께 왔으면 매운탕을 같이 먹자고 쉽사리 얘기하기 힘들 것이다.
긴 검색 끝에 찾아간 식당은, 특이하게도 솥뚜껑에 매운탕을 끓이는 곳이었다.
우선 저수지 앞에 위치한 식당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랐고, 테이블마다 설치된 솥뚜껑 드럼통에 두 번 놀랐다. 솥뚜껑 삼겹살, 솥뚜껑 닭볶음탕까지는 봤어도, 솥뚜껑 매운탕은 처음이다. 매운탕을 왜 솥뚜껑에 끓일까 의아했는데, 끓이자마자 변화되는 매운탕의 화학작용을 보고 바로 수긍했다. 처음에는 멀건 국물 위로 채소만 둥둥 떠다니는 비주얼을 보고, 잘못 찾아온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강력한 화력으로 젓지도 않고 몇 분간 끓이면, 마법처럼 국물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매운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시뻘건 색깔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 끓이기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조바심이 날 무렵, 이모님이 우리 자리로 오신다. 국자로 살짝 저어 양념을 섞어준 후, 통째로 들어가 있는 메기를 가위로 듬성듬성 자른다. 무심해 보이는 표정과는 반대되는, 빠르고 정확한 전문가의 손놀림에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그렇게 잘 끓고 있는 매운탕을 지켜보며 '언제 먹으면 되지?' 하면서 기다리다 보면, 또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이모님이 오신다. 이번에는 넓적한 밀가루 반죽을 가지고 오셔서, 잽싸게 조금씩 떼어 매운탕에 넣는다. 주문할 때 수제비를 추가해야 되나 망설였었는데, 넣는 양을 보고 안 하기를 잘했다 생각했다. 이모님은 큰 반죽 한 덩이가 눈깝짝할 새에 없어지는 마술을 보여주시고는, 시크하게 자리를 떠나셨다.
드디어 시식 시간이다.
이모님은 수제비가 불으니, 먼저 이것부터 먹으라며 그릇에 듬뿍 담아 주셨다. 하나 떠서 후후 불어가며 맛을 보니, 감자탕집에서 종종 보는 공장표 냉동 수제비와 확연한 차이가 났다. 한쪽은 두껍고, 한쪽은 얇은 두께 차이에서 오는 식감 차이가 재미났고, 즉석에서 수제로 만들어주셔서 그런지 부드럽게 술술 넘어갔다. 솥뚜껑에서 팔팔 끓다 나와서 그런지 무지 뜨거웠고, 얼큰한 매운맛까지 더해지니 저절로 땀이 났다. 수제비 시식이 끝났다면, 매운탕의 주인공인 메기 차례다. 요 앞 저수지에서 갓 잡아 올린 것 같은 느낌의 메기는, 민물고기 특유의 비린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껍질은 반질반질, 살코기는 탱글탱글. 숟가락 가득 빨간 국물을 떠서 그 위에 푹 익은 채소와 메기살을 같이 올려 한 입 먹으면, 저절로 '캬~~~ 아!' 소리가 나온다. 대놓고 맵기만 한 캡사이신 맛이 아닌, 자연의 얼큰한 맛이 느껴지는 요리다. 평소 집에서 먹기 힘든 메기 같은 민물생선을 만나니, 반갑기만 하다. 근 20년 만에 먹는 손수제비 역시 중독성이 강해 손이 계속 간다.
"아, 어른이 되길 잘했어. 이게 바로 '으른'의 맛이지!"
남편에게 괜히 너스레를 떨어본다. 아이가 없이 둘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매번 일말의 죄책감(?)이 들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예외다. 어른보다 더 큰 사람으로 느껴지는 단어인 '으른'들만 알 수 있는 이 맛을, 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메기 매운탕을 통해 느낀 오늘의 어른의 맛은, 참으로 맵고 뜨겁다. 그러나 이 뜨거운 걸 먹으면서도 시원하다 말하고, 매운 걸 먹으면서도 '좋~~~ 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어른들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참맛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뜨거움과 통각의 자극을 견디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어른들의 신세계는, 얼큰한 매운맛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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