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램지한테 혼날 요리
우리나라 외식업계를 살려놓았다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흑백요리사를, 아직도 보지 못했다. 여름쯤이었나... 한동안 중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한 넷플릭스를 과감히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것만 없으면 책을 읽고 운동을 하는 주말을 보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뭐 예상대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출근 준비를 하며 옷을 입을 때도, 퇴근 후 샤워를 할 때도 항상 넷플릭스와 함께 했던 과거를 한 번에 정리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칼 같은 헤어짐은 너무 정이 없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구독 취소에 대한 후회 가득한 마음과 금단 증상으로, 넷플릭스를 대체할 다른 OTT를 찾아 헤맸다. 마침 쿠팡 회원 가입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쿠팡플레이를 냉큼 다운로드하였다. 어차피 흑백요리사는 여기에 없었지만, 비슷한 요리 프로그램이라도 있겠지 싶어 열심히 뒤져봤다. 반갑게도 메인 화면에 '마스터 셰프 USA'라는 글자와 고든 램지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오예! 요즘 애들 말로 개이득(?)이다. 믿고 보는 고든 램지의 방송은, 언제나 긴장감 가득, 맛있는 음식들 가득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갈증을 오늘 다 풀겠다는 마음으로 마스터 셰프를 보는데, 마음 한 구석이 석연찮음을 느낀다.
분명 재미나고 신나는 감정이 최고조여야 했지만, 한편으로 불편하기도 했다. 경쟁을 워낙 싫어하고 화합을 중시하는 나의 성향 때문에 그런가 싶었으나, 비단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곰곰이 마음을 살피니, '떨어진다'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불안 때문인 것 같다. 경합이 진행될수록 한 명 한 명 떨어지는 참가자들을 보며,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토록 열심히 노력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잠깐의 실수 한 번으로 모든 걸 내려놔야 하는구나. 탈락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많이 배웠다고, 여기까지 오게 돼서 감사했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자꾸 감정 이입이 되었다. 떨어진다는 것이 인생의 끝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그들의 상황에 나를 대입하게 된다. 회사에서 줄곧 칭찬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회사의 경연에서 점점 경쟁력을 잃어간다는 아픈 현실을 말이다. 위로 난 길만 줄곧 바라보며 계속 달려왔는데, 그 길이 끊긴 느낌이 든다. Top 15인에서 탈락하면 과연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끝없이 상상한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여기에서 부쩍 성장했다며 무대를 떠나는데, 나는 그가 앞으로의 삶에서도 실패하고 좌절할까 봐 걱정한다. 탈락이 인생의 다른 시작임을 아직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고된 나의 퇴사와 자꾸만 겹쳐지는 무거운 감정과는 별개로, 시덥잖고 우스운 상상도 해본다.
바로 고든 램지에게 나의 요리를 평가받는 공상이다. 마스터 셰프 참가자 중 한 명이 되어 45분 안에 음식을 만들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 앞에 접시를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려나. 올해 초 겨울에 만들었던 사진 속 양갈비가 그 주인공이라면? 하필이면 고든 램지가 만들었다는 '허브 크러스트 양갈비(Herb Crusted Rack of Lamb)'를 나도 따라 만들었는데, 그의 표현대로 '아름답게 익지(beautifully cooked)' 않았다면 바로 탈락감이겠지.
그러나 나는 까댜로운 고든 램지가 아닌, 함께 요리를 먹는 식구들에게 어이없는 불합격 판정을 받고 말았다. 허브 크러스트 양갈비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요리다. 고든 램지라면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겠지만, 서양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순서를 기억하고 따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우선 양갈비를 소금 후추로 밑간을 하고, 허브 크러스트의 재료를 만든다. 가장 중요한 재료인 서양식 허브가 없다면, 한국식 허브인 깻잎이나 부추 등을 이용해도 된다(출처 - 유튜버 육식맨). 빵가루와 각종 허브, 파마산 치즈, 올리브 오일, 아몬드나 잣 같은 견과류를 믹서기에 넣고 윙윙 갈아준다. 이후 간이 잘 밴 양고기를 달궈진 프라이팬에 앞뒤로 노릇하게 잘 굽고, 머스터드를 마치 액체풀처럼 고기에 바른다. 그리고 아까 만든 허브 크러스트를 꼼꼼하게 골고루 덧붙인다. 아직 끝이 아니다. 고기가 속까지 익도록 200도 오븐에 30분간 구워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만든 양갈비를 한 입 맛본 남편과 딸은, 어떻냐는 나의 질문에 눈치를 보며 답했다.
"음... 고기는 그냥 소금만 뿌려서 구워 먹는 게 최고인 것 같아."
이럴 거였으면 아까 소금 후추 간 해놓고 바로 프라이팬에 구워서 내놓을 걸 그랬다.
허브 크러스트를 만든답시고 부추를 다듬고 자르고, 잘 갈리지도 않는 믹서기에 몇 번이나 넣다 뺏다 하는 짓도 안 했을 텐데. 빵가루가 주방 바닥에 쏟아지는 불상사도 없었을 텐데. 오븐에 굽기까지 과정에서 들어간 나의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다.
하긴 생각해 보면 남편이나 딸은 순수한 육식파로서 고기를 좋아하니, 굳이 풀냄새가 폴폴 나는 겉옷까지 입힐 필요가 없었긴 했다. 마스터 셰프에 나오는 멋진 요리에 도전해 보겠다는 내 욕심으로 만들어진, 허영심 가득한 요리랄까. 게다가 허브 크러스트는 제대로 붙어있지 않고 어찌나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던지. 군데군데 이빨이 빠져 있는 모양새였다. 한식 요리였다면 양념을 더해서 그럴듯하게 가렸을 텐데, 이건 뭐 직관적 요리라 가릴 틈이 없다. 고든 램지가 봤다면 집어던졌을지도 모를 겉모습이다. 아마도 이렇게 말했겠지.
"이번 미션에서 탈락하셨습니다. 당신의 여정은 여기까지입니다."
열심히 했던 노력은, 매번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과함이 모자람보다 못함을 요리에서도 느낀다. 그러나 누가 뭐 라건, 나는 맛만 좋더라. 요리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사람이라, 스스로를 정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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