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 Bohan
1960 - 1989
마크 보한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식어는 'Dior's Longest-Serving Designer'이다. 마크 보한은 30년간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는데, 이는 창립자인 크리스찬 디올의 10년보다도 더 긴 기간이다. 마크 보한은 디올의 미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어쩌면 우리가 '디올스럽다'라고 말하는 그 스타일은 마크 보한으로 인해 자리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Marc Bohan,
Designer Who Oversaw the Dior Look for Decades, Dies at 97
As the creative force for Christian Dior longer than its founder,
he maintained a reputation for playful elegance throughout fashion’s endless cycles.
- The New York Times -
마크 보한은 가장 긴 기간 디올 하우스를 이끌었지만, 긴 업적에 비해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다. 아무래도 이브 생 로랑과 비교해 그 차이가 더 두드러지는 듯하다. 망쳐버린 컬렉션 이후 이브 생 로랑이 군대에 가게 되면서 빈자리를 마크 보한이 채우게 되는데, 처음엔 다들 그가 실수하길 기다리는 사람들 마냥 눈에 불을 켜고 지켜봤다고 한다. 그런 그의 첫 컬렉션이 성공을 거두며 차츰 마크 보한은 인정받게 된다. 원래 이브 생 로랑이 전역 후 디올로 복귀하는 조건이었으나, 디올 하우스는 리스크가 큰 이브 생 로랑 대신 안정적으로 성공적인 컬렉션을 선보일 수 있는 마크 보한의 손을 들어준다. 이브 생 로랑에게 계약 위반으로 인한 보상금을 지급하면서까지 마크 보한을 선택하게 되고, 이 자금이 기반이 되어 이브 생 로랑의 YSL 브랜드가 시작되었다고.
지난 시간에 살펴봤 듯이 이브 생 로랑은 천재 디자이너였지만, 전통적인 브랜드에 적절하지 않은 과감함이나 본인의 나이처럼 너무 어린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디자인으로 디올의 정체성을 다소 해쳤다. 그에 비해 마크 보한은 디올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여전히 디올의 여성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Bohan had already worked in Paris for 13 years, the last four as designer at Jean Patou, and understood clothes also had to please paying customers who were not models.
디올 하우스가 마크 보한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고객'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모델이 아닌 일반 여성들이 이 옷을 구매하고 입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
이것으로 마크 보한의 30년을 설명할 수 있다.
마크 보한이 좋은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디올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성과 우아함의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이 가치를 '보기 좋은 옷'의 형태적 특징만 강조하거나, '특별한 날 입는 옷'에 한정 짓거나, 고급 예술의 영역인 '오뜨쿠튀르'에만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는 미국에서부터 히피 문화가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졌는데, 자유롭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가치의 흐름 속에서 패션 계 역시 오뜨쿠튀르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마크보한은 1967년 Miss Dior이라는 기성복 라인을 시작한다. 좀 더 일상적으로 입을 수 있는 짧고 편한 코트, 치마 위주의 복식을 디올 이름으로 선보이게 된다. (Miss Dior:The Birth of Ready to Wear)
디올의 우아함, 여성스러움을 살리면서 편한 일상복을 디자인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 둘을 모두 잘 살렸다. 옷을 입고 있는 여성들이 한결 편해 보이고 당당해 보인다. 지금도 이 시절의 빈티지 라인을 구할 수 있다면 충분히 입을 법하다.
그럼에도 '디올이라기엔 다소 평범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텐데, 그래서 아래 이미지들은 사심 담아 예쁜 드레스들로 모아보았다. 크리스찬 디올 생전에 모티브로 활발히 사용했던 '꽃'과 크리스찬 디올이 사랑했던 풍성한 치맛단과 라인. 마크 보한은 이번에도 아름다움과 편함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찾아냈다.
마크 보한이 디올에서 기성복 라인을 론칭하고, 여성들이 입기 편한 옷을 다양하게 선보이긴 했지만 디올 하우스는 여전히 오뜨쿠튀르 하우스이다. 디올에서 자랑하는 것 중 하나가 예술적인 디테일인데, 이런 가치는 기성복이 아닌 고급 예술에 가까운 맞춤복 라인인 '오뜨쿠튀르'에서 극대화된다.
마크 보한은 오뜨쿠튀르도 놓치지 않았다.
특히 그 시대 최고의 할리우드 스타이자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와 디올은 관계가 깊다. Princess 그레이스 켈리와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며 마크 보한의 디올은 아름다움, 우아함, 고급스러움 같은 가치를 지켰다. 혹자는 디올이 그레이스 켈리가 여배우에서 프린세스가 되도록 도왔다고 평하기도 했으니, 매력적인 상부상조 관계였다.
마크 보한은 'Baby Dior'이라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라인도 론칭했는데, 그 론칭 행사에 젊은 엄마였던 그레이스 켈리도 참석했다고 한다.
마크 보한은 30년간 디올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짧게나마 론칭했던 자신의 브랜드는 성공시키지 못했다. '경영'을 책임져 줄 좋은 파트너를 만나지 못한 것도 이유였겠지만, 어쩌면 (슬프게도) 마크 보한은 자기만의 브랜드를 이끌기엔 개성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마크 보한의 시기는 안정적이었고 아름다웠지만 혁신적이거나 엄청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브랜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크 보한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 그는 크리스찬 디올이 남긴 유산을 잘 유지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적절히 가공했다. 이 시대에 디올의 옷을 사고 입은 고객들은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마크 보한의 디올'보다는 '디올'만 남긴 30년이었지만, 이것이 디올의 디자이너로서 그가 해야 할 최고의 성과라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보면 슬프지만, 슬플 일 만은 아니다. 모두가 자신만의 브랜드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브 생 로랑 대신 마크 보한을 선택했던 디올 하우스의 결정은 현명했다. 감히 추측하건대, 이브 생 로랑이 디올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지금의 디올은 없을 것이다. Dior도 Saint Laurent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으니, 결국 각자 있어야 할 자리, 맞는 역할이 있는 것이다.
디올은 현재 LVMH 그룹에 소속된 브랜드이다. 마크 보한은 디올이 LVMH 그룹에 인수되는 과정에서 디올을 떠나게 되고, 지앙 프랑코 페레라는 이탈리아 출신 디자이너가 디올 하우스를 이어간다. 다음 시간에는 지앙 프랑코 페레의 디올에 대해 디깅 해보겠다.
마크 보한의 디올에 대해 디깅 하며 기분이 좋았다. 컬렉션이 다 예쁘고, 감탄스러웠다. 센세이셔널하진 않았지만, 디올에게 기대하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안정적으로, 마음껏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대중에게는 유명하지 않은 마크 보한을 알릴 수 있다는 점도 뜻깊다. 지난번 이브 생 로랑 글이 생각보다 많은 이들에게 읽혔는데, 이번 글도 재밌게 읽히길 바라며!
Edited by Cherri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