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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로 Aug 26. 2021

<금쪽같은 내 새끼> 보면 뭐해

어제 또 화를 냈다. 화를 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지 반나절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가 울었고 나도 뒤돌아 울었다. 아이를 키우며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육아라는 회사는, 상사가 내 자식들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때려치우고 나왔을 직장이다. 하지만 나는 미운 네 살에서 진화한 미운 다섯 살 회장님과 말 안 통하는 부회장님을 모시는 종신계약 직원일 뿐이다.


첫째만 있을 땐 그래도 할 만했던 것 같다. 아이의 성향이 워낙에 유순했던 덕분도 있지만, 확실히 한 명 상대하는 게 편했다. 딸과 아들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아들은... 아, 말을 잇지 못하겠다.


워낙에 회사 일이 바쁜 남편이기에 오랜 기간 거의 혼자 아이를 양육하다 보니 나의 인내심은 점점 바닥을 향해 가고 있다. 양가 부모님이 아이를 봐주는 게 당연하지 않지만 당연해진 요즘, 우리 부부의 부모님께선 아이를 잠시라도 돌봐 줄 여건이 되시질 않는다.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는 어린이집 선생님이다.


그런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주말 아침에 키즈노트 공지를 올렸다. 주말에? 왜? 설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 제발..."


설마는 이루어진다. 확진자였다. 확진자가 나왔다는 한 줄의 문구를 보자마자 오만가지 생각이 덮쳐왔다.


코로나 검사 또 받아야 하네. 이 더운 날 어디 가서 받아야 애들이 덜 고생하지. 자가 격리할 수도 있는 건가? 오빠 회사 사람들은 어떡하지. 어린이집 폐쇄하나? 가정보육해야 하네. 그럼 난 언제 일해? 애들 삼시세끼 밥은 뭘 차려 먹이지. 나... 괜찮을까?


고민이 많은 게 고민인 INFJ에게 어린이집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코로나가 머리채를 붙잡고 한 방울 남은 멘탈까지 탈탈 털어버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둘째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미쳤나 봐! (내가!) 왜 이 타이밍에 열이 나! (네가!) 내 아이가 코로나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공포 그 자체였다. 온 식구가 선별 진료소로 달려가 검사를 했다. 돈 낼 테니 오늘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검사를 하고 싶다 했는데, 요즘 확진자가 하도 많아서 무조건 무료 진료소를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이지 결과를 기다리는 그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다음 날 오전에 음성 판정을 받았다. 확진된 아이가 등원을 하지 않은 기간이 있어 자가격리 대상자에서도 제외됐다. 그러나 원은 2주 폐쇄가 결정됐다. 2주 동안 이 아이들을 책임지고 먹이고 설거지도 하고 씻기면서 빨래도 돌리고 개고 치우고 재우기까지 해야 하다니. 워킹맘이니 일도 해야 한다. 하하하하하!


이건, 사실상 자가격리다. 이 모든 것을 처리하다 보면 쓰레기 버리러 나갈 시간도 없었다. 어제는 아아 수혈하는 것도 잊었다. 산책도 사치다. 일단 아이들과 산책을 나가려면 옷을 갈아 입혀야 한다. 옷 갈아 입히는 게 뭐 큰일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큰일이다. 아이들은 옷을 입자고 하면 왜 도망가는 걸까? 도망 다니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옷을 입히고, 신기면 벗고 신기면 벗는 신발을 겨우 신긴다.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거쳐 밖으로 나가면 또다시 잡기 놀이가 시작된다. 엄마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산책 따윈 없다. 나가자마자 분리돼 달아나는 녀석들을 "엄마랑 같이 가야지!"라는 말 한마디로 붙잡히길 바라며 부리나케 뛰어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달리기를 했으면 씻겨야 하고, 그럼 또 밥 차릴 때가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엄마는 산책을 포기한다. 이걸 자의라고 해야 할까, 타의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아무튼, 사실상 자가격리다.


아이들도 답답한 지 말썽과 징징거림의 정도가 심해졌다. 첫째는 집에서만 노는 게 심심했는지 그 조막만 한 머리를 굴려 자신만의 놀이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곧 거실이 난장판이 되는 것으로 이어졌고 나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둘째 낮잠 재우는 사이에 거실을 물바다로 만들어놔서 매트 사이사이로 스민 물을 닦기 위해 매트를 다 들어내고 걸레질을 하고... 그만 말하자. 다시 화나니까.


둘째는 두 돌도 안 됐기에 일단 말이 안 통하는 게 가장 문제다. 첫째는 딸아이라 그런지 이때쯤 이미 의사소통이 가능했는데, 이제 겨우 단어를 따라 할랑 말랑한 둘째에게 원활한 의사소통은 기대할 수 없다. 둘째는 올라가면 안 되는 곳에 올라가고, 만지면 안 되는 것을 만지고, 먹으면 안 되는 것을 먹으려 하고, 꺼내면 안 되는 것을 꺼내고, 던지면 안 되는 것을 던진다.


오은영 박사님이 그랬다. 아이들에게 "야!"라고 부르지 말라고. 안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고. 짧고 간결하게 훈육하라고. 나는 그중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거의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봤는데. 보면 뭐하나. 실전에서 써먹질 못하는 걸. 이론이 빠삭해도 감정의 노예가 되면 늘 했던 다짐을 잊는 것이다.


일단 남편과 나는 둘째 아이가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면 "OO야, 안돼!"를 외친다. 어디서 무슨 사고를 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 그것마저 잘 안 된다. 세상에 자식 혼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나는 오늘 또, 모자란 엄마다.


거기다 오늘은 첫째 아이가 일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서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내가 실수해도 괜찮다고 해주세요."


응? 뜨끔하고 따끔거렸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다섯 살 아이가 짠해서 엄마가 혼내는 게 무서웠느냐고, 엄마가 앞으로는 친절하게 말하겠다고 약속하며 꼭 안아줬다. 그리고 첫째 아이가 앉아있던 쪽으로 눈을 돌리니 다시 한번 물바다가 되어 있는 거실을 발견했다. 웃음이 났다. 혼날까 봐 선수 쳤구나.


귀엽게도, 결국 나를 가르치고 훈육하는 건 아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아무리 봐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도루묵이다. 또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결국 브라운관 속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나의 일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데 내 자식의 진심 어린 한 마디엔 바로 심장이 뜨끔한다. 내가 작은 실수에 너무 큰 화를 냈던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이와 나는 합의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실수를 했을 땐 혼내지 않기로. 그리고 어지른 건 어지른 사람이 치우기로. 덧붙여 엄마는 치우는 사람이 아니라 치우는 걸 돕는 사람이라고도 알려줬다. 그러자 아이는 자신이 만든 물바다를 개천 정도까지 치웠다. 결국 내가 치우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적어도 화는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건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본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던 합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남은 하루, 빡침 포인트가 여러 번 있었지만 심호흡을 하며 버티고 있다. '화내 봤자 달라지는 건 없고 오히려 안 좋아진다.'를 되새기고 되새기며.


그리고 이렇게 분노의 글쓰기를 마친다. 일로 쓰는 글도 이렇게 술술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 어쩌면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은 빡침이 아닐까? 아니다. 신세 한탄이라 술술 써지는 듯하다. 쓰고 나니 좀 살 것 같으니.


이제 또 밥 차리러 가야겠다. 그래도 오늘은 한 번만 더 차리면 끝이라 다행이다. 아직 2주의 반도 못 왔지만 내일 걱정은 좀만 이따가, 모레 걱정은 좀만 더 이따가 하자. 아, 인프제는 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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