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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로 Oct 01. 2021

누나라서 양보하지 않아도 돼


  남매를 키운다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렵다. 물론 각각 아이가 타고난 기질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도 있지만 성별에서 오는 차이 때문도 있다. 더구나 아직 다 걷히지 않은 유교문화의 잔상 탓도 있는데, 그 예로 첫째 딸에게 아무렇지 않게 전달되는 사람들의 말들을 꼽을 수 있다. 그중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문장이다.


  "누나니까 양보해야지."


  나이가 많으니까 당연히 양보해야 한다는 인식과, 예민하게 보면 성별 차별에 대한 뉘앙스까지 풍기는 말이다. 


  나 역시 네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을 둔 첫째 딸이다. 살면서 '누나니까 양보하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가족 바깥에 있는 외부인들에게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내게 누나니까 양보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 역시도 내 아이들에게 '네가 누나니까, 네가 동생이니까, 네가 여자니까, 네가 남자니까' 이런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32개월 차이 나는 똑똑이 다섯 살과 두 돌쟁이 세 살을 키우다 보면, 똑똑이 다섯 살이 양보해야 하는 일이 왕왕 생긴다. 대부분 언어 소통이 원활한 첫째에게 양보를 권유하게 되는데, 내가 선택한 멘트는 이것이다.


  "동생은 네가 하는 걸 보고 다 따라 하지? 동생이 누나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네가 동생에게 양보하는 걸 계속 알려주다 보면, 동생도 언젠간 네게 양보할 거야. 동생은 따라쟁이니까. 혼자서 양말을 신을 줄 몰랐던 동생이 널 따라서 양말을 신기 시작했고, 사운드북 전원을 켤 줄 몰랐던 동생이 널 따라서 사운드북 버튼을 누르게 된 것처럼."


  다행히도 이 구구절절한 멘트가 첫째에겐 꽤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진 것 같다. 그 이후 첫째는 종종 자기가 내킬 때 동생에게 먼저 양보하곤 쪼르르 달려와 말한다.


  "엄마. 내가 동생한테 양보했어. 동생은 지금 너무 아기라서 양보를 모르니까 내가 알려주는 거잖아."


  물론 첫째에게만 양보를 권하지 않는다. 둘째에게도 알려주긴 알려준다. 눈을 마주치고 앉아서 이건 누나가 먼저 가지고 놀고 있었으니까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고 조곤조곤 설명하지만, 사실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은 포기하지 않아야만 가능한 것이기도 해서 먹히지 않아도 반복하는 훈육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이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놀이터에서 만난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어떤 어린이집의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먼 친척 어르신으로부터 그 말을 듣는다.


  누나니까 양보해야지.


  진짜 말 그대로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양보하는 데에 왜 나이를 따지는 걸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양보가 미덕이라 강요하는 건 아닐까? 사실, 양보하고 싶지 않으면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 나 조차도 양보하고 싶지 않을 땐 하지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할 건 양보가 아니라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쓰면서 궁금해져 포털사이트에 사전적 의미를 검색해보니 이렇게 나온다.


- 양보 :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남에게 미루어 줌.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
- 배려 :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


  오늘부터는 아이들에게 양보 대신 배려라는 단어를 알려주는 편이 더 좋겠다. 너무 자기만 아는 아이로 크는 것을 바라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생하는 게 미덕인 줄 아는 아이로 자라는 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독학 육아는 이렇게나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한다. 태어나 해본 일 중에 가장 어렵고 힘들지만, 피할 수 없으니까 매일매일 녀석들의 다툼을 중재할 수밖에. 다만 오늘은 아이들이 엄마인 나를 배려해주면 참 좋겠다. 거짓말처럼 다투지 않는 오후와 주말이기를. 물론, 싸우지 말라고 똑같은 장난감을 두 개 사줘도 꼭 그 하나를 가져야겠다고 싸우는 녀석들이라 들어주기 힘든 엄마의 부탁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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