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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A Jun 03. 2023

약간 이른 상반기 회고 -2

상반기는 자주 행복했지만 동시에 후회로 점철된 달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뭔지 알면서 바보같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고,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임을 알면서 더 빨리 내렸어야 할 결정을 뒤로 미뤄왔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려 했고 불필요한 감정에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쏟았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사실은 속인 것과 다름없는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그렇게 보이고 싶어 만들어 낸건지 구별하려다 진이 쏙 빠졌다. 눈이 어두워 아직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는구나. 나를 책망하는 기분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거의 처음 간 등산. 아차산-용마산을 탔다.


대신 태도가 우아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한창 울퉁불퉁했던 마음이 많이 매끄러워졌다. 이를테면 며칠 전 산행이 그랬다. 같이 산에 오르는 사람이 뒤쳐지지 않게 몇 번이고 뒤돌아서 기다려 주는 마음. ‘다 왔어’를 주문처럼 외며 아무렇지 않게 도닥이는 말들.


혹은 몇 번 보지 않은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베푸는 것에 크게 아까워하지 않는 태도. 피곤해도 ‘얼굴 한 번 봐야지’ 하며 시간을 들여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에 주저 않는 성실함.


문제가 생기면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지겹게 얘기하는 나를 참아주는 마음.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끝까지 듣는 일관성. 판단은 뒤로 하고 마음 깊은 곳까지 공감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여유.


넘어진 사람이 민망할까봐 자기가 넘어졌던 얘기를 쏟아내며 머쓱함을 덜어주는 배려.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태도. 자기가 아는 걸 자주 공유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경험을 선사하려는 선의. 누군가 힘들어 보일 때 작은 선물을 주는 걸 기쁨으로 삼는 씀씀이.


약속 시간을 잡을 때 상대 위주로 고려하는 다정함. 답답할 때 흔쾌히 태워주는 드라이브. 머쓱한 주차 걱정에 그런 걸 왜 신경 쓰냐며 건네는 귀여운 핀잔.


그런 순간들을 그러 모으니 상반기 키워드는 ‘사람’이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동안 너무 많은 배려에 익숙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너무 성숙한 사람들을 만나 편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돌아봐야 했다.


미성숙한 나의 지점을 많은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참아준 건 아닌지 들여다보며 오싹하기도 했다. 다 사랑이고 배려였는데 그때그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록하지 않아 소중한 순간들을 많이 놓쳤던 것 같다.


기록이라는 게 뭐 별 건가. 이건 노동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공을 들이는 것이다. 일이든 일상이든 길어 올릴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르게 마주하는 것, 여러 순간 중 내가 택한 그 순간을 담을지 흘려 보낼지 결정하는 게 기록이다.


쓴다는 표면적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무언가 하는 행위가 단지 쓰는 것뿐이야. 그러니 별로 부담스러울 게 없다.


하반기에는 어떤 순간을 주워 담아야 할까. 그리고 어떤 것들을 흘려보내야 할까. 좀 더 면밀히 순간을 바라보고 적어내려 가고 싶다.


2023년 끝자락엔 그렇게 주워 담은 것들로 마음이 두둑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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