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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어함박눈 Jun 30. 2020

심지어 함박눈

2011년 12월 25일

수능이 끝난 지 한 달 하고도 2주 정도 지났을 적에 나는 사당역 골목길의 어느 떡볶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날도 별 반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다른 점을 찾으라면 '안녕히 가세요' 대신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인사를 건네었던, 그런 날이었다. 그렇게 7~8시간이 흘러 어느 덧 퇴근시간이 되었고 나는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했다.


캐비닛을 열자 빈 공간일 줄 알았던 내 옷가지들 옆에 알록달록한 케이크와 무알콜 샴페인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사장님은 나긋한 목소리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선물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알려주셨다. 더불어 가족들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준비한 소소한 선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때부터 평소와는 다른, 이제껏 찾아볼 수 없었던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하얀 눈 위로 한 발씩 걸어가는 얼룩고양이가, 빨간 조명으로 꾸며놓은 건물들이 보였다. 단지 내 양손에 흔해빠진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샴페인이 들려있을 뿐인데도 소소행복이 나에겐 너무 커서 내 입꼬리는 도대체가 내려가질 않았다.


함박미소를 머금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주변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덧 집 앞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내리기 전 버스 아저씨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몇 안 되는 버스 계단을 내려가 정류장을 지나쳐 신호등이 초록색 불을 밝힐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피부 위로 차가운 무언가 내려앉았다.

눈이었다.

그것도,


심지어 함박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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