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금고에는 무엇이 들어있나요?
금고에 넣을 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금고에 넣어 놓을 정도라면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귀한 것이겠다.
얼마 전, 고향집에 다녀왔다.
안방에 들어갔는데 못 보던 검은색 네모난 보관함 같은게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뭐냐고 물으니 금고를 샀다면서 해맑은 웃음을 짓는 아빠다.
"아니, 금고를 왜 사?" 정말 당황스럽고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본 말이었다. 우리 집엔 딱히 금고에 보관할 만한 것들이 없는데 말이다. "그냥 좋잖아." 아빠만의, 아빠만을 위한 보물상자였을까. 그 금고가 아주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아빠의 모습에 '아빠가 좋다면 됐지 뭐.'라고 생각했다.
금고를 열어보니 내가 상상하던 금고 속 모습과는 달랐다.
자신이 평생을 일한 회사에서 준 근속 메달과 여러 뱃지들이 들어있었고 그 밑에는 몇 년 전, 생신선물로 사드린 여전히 새 거 같은 지갑과 내가 초등학생 일 때, 조금씩 돈을 모아 선물했던 문방구 표 싸구려 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얇은 은색 메탈에 파란 바탕을 지닌 시계였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색이 많이 바래긴 했지만 20년이 지난 시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아빠,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그럼, 딸이 준 건데."
이내 시계를 꺼내 옷으로 한번 닦아주고는 다시 금고 안에 곱게 넣어놓는 아빠다.
"구경하고 문 잘 닫고 나와." 라고 말하며 방에서 나가는 아빠.
"응, 알았어...."
아빠가 나간 후, 나는 한참을 그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를 선물하던 날이 기억난다. 검은색 직사각형 박스에 시계를 고이 넣어 예쁜 리본을 달아 주던 그날이. 사실 액세서리를 잘하지 않는 아빠였기에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물이었다. 다른 아저씨들은 하나씩 다 하고 다니는 시계가 아빠 손목에는 없었던 게 어린 마음에도 신경이 쓰였던 거였다. 그리고 초등학생일 그때, 내가 가진 돈에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시계이기도 했다.
나는 아빠에게 최고는 못하더라도 최선의 것들을 주고 싶었다.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아 이렇게나마 되돌려 주고 싶었지만 아빠는 언제나 헤질까, 닳을까, 아끼고 아꼈다. 꼭 그 물건이 나이기라도 한 것처럼.
'아끼지 좀 말라니까, 정말....'
금고 안, 여전히 새 거 같은 지갑과 시계를 보니 속이 상했다.
근속 메달과 뱃지는 가족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해 온 아빠였음을 증명했다. 좋은 것만 하라고, 이젠 그래도 된다고 말해도 항상 자신보다 가족들을 생각하는 아빠의 모습에 '참, 변하지 않는 사람' 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이젠 '자신을 좀 더 챙겨도 될 텐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이렇듯 아빠의 사랑은 매번 생각지 못한 순간 커다랗게 다가와 마음을 흔들었다.
언젠가, 어느 모임에서 아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 딸들은 참 욕심이 없어요. 다른 집 자식들 보면 사달라고 하는 것도 많던데 우리 딸들은 사준다고 해도 다 괜찮다고 해요. 그게 어쩔 때는 참 밉다니까요."
그때, 아빠의 말은 충격이었다.
내게 있어 "괜찮다."라는 말은 아빠를 위하는 말이었고 에두른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다.
언제나 딸들을 위하던 아빠가 이제는 자신에게 더 베풀길 바랬으니까. 좋은걸 입고. 먹고, 즐겼으면 하고 바랬다. 그래서 아빠의 노후가 조금은 더 편안하고 행복했으면 했다.
아직은 주제넘은 생각이었을까.
아직은 조금 더 투정 부리고, 조금 더 아빠를 필요로 했어도 됬을까.
어릴 적 아빠 품에 안겨 칭얼거리던 그때처럼.
하지만 아빠는 알고 있음에 분명하다.
아빠가 시계를 아꼈던 것처럼 나 또한 아빠를 위하는 마음에 그랬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 다름에도 너무나 닮아있으니까.
사랑의 방식은 다름에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으니까.
아빠의 금고 속에는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