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커튼> & 노아 크루먼 <플롯 강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밀란 쿤데라의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에 소위 뼛속까지 공감한다. 누군가의 나이로만 그 사람의 전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은 '사람은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 변화하기 때문에 '나이'가 의미가 있다. 만약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외면도 내면도 모든 것이 절대 변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나이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가 늘 똑같을 테니까.
서른셋의 나와 마흔이 된 나는 같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상상할 수 없다. 지금은 나는 서른셋의 그녀를 반추하며 경악한다. 이 경악은, 진짜다. 그렇다면 서른셋의 내가 스물다섯의 나를 떠올리며 경악했을까? 그렇진 않았다. 현재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경악스러울 만큼 '극적으로 퇴보'했지만 그 퇴보를 눈치챌 경황이 없었다.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 혼돈에 휩쓸리며 빛 좋은 개살구, 속 빈 강정처럼 겉만 멀쩡했다. 그렇다면 마흔의 내가 스물다섯의 나를 떠올릴 땐? 그건 거의 다른 생이다. 전생의 존재를 믿지도 않는데 마치 전생처럼 느껴지는.
어떤 사람은 단 하나의 큰 사건만으로 세계관의 엄청난 변화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크고 작은 변화 속에 서서히 변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바뀌었다. 결과만 놓고 비교하면 너무 큰 변화였다. 그 격차에 순간순간 어지러울 때도 있다. 점차 균형을 찾아가고 있지만 그 또한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두 권의 책을 읽다가 나의 이런 변화가 (당연히) 개인의 경험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그리고 무척 '심오한 여정'을 지나온 것이라는 것을 재차 깨닫게 되었다. 당초 이 책들을 고른 목적은 '글쓰기'때문이었는데, '나에 대한 여정'으로 되돌아오다니.. 내게는 이 주제가 종료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가 보다. 남은 인생 동안 계속 현재 진행형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래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선을 두는 정도나 방향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책 <커튼>은 김영하 작가의 책 <말하다>를 읽다가 주문했다.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밀란 쿤데라를 몇 차례 언급하는데 자세한 내용이 궁금했다. 짐작으로는 출처 중에 <커튼>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았다. 맞든 아니든 상관없이 책 소비 명분이 생긴 나는 밀란 쿤데라의 <커튼>과 <만남>을 바로 주문했고 <커튼>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여러 꼭지로 나눠서 정리하고 싶을 만큼, 누가 내 인생이라는 연극의 커튼을 열고 잠시 들여다보고 쓴 거 아니야 싶을 만큼 흥미진진했다. 그야말로 소름 돋는 깨달음, 전율을 주는. 내게 흥미로운 책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1) 의식조차 못하고 있을 때 뭘 '질문'해야 하는지 알려줌으로써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어떤 걸 놓치고 있는지 슬며시 찔러 주는 책
2)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지만 질문이 답답하게 맴돌기만 하고 문장이 되지 못하고 있을 때 명료하게 언어화해 주는 책
3) 오래도록 질문으로 품어왔고 늘 한편에 생각은 하고 있으나 어떤 걸 보고 읽어도 별 진척 없이 답답해하고 있을 때 그 실마리를 살짝 보여주는 책.
<커튼>은 마지막 3번째의 경우다. 내 마음속에는 미해결 되고 유보된 여러 질문이 밤안개처럼 떠다니고 있다.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주제 중에는 '미학과 삶', '관료주의', '망각과 기억의 변형', '도덕적 흑백논리와 비극'등과 관련이 있다. 까만 밤, 망망대해 위 작은 배에 홀로 앉아 있는데 저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등대의 불빛을 발견한 느낌.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에서 얘기하는 '나이와 정체성'에 대한 것.
밀란 쿤데라는 "커튼 뒤에 숨겨진 삶의 나이"라는 꼭지에서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작가 치오란의 예를 든다. 그녀는 삼십 대 중반에 작가가 되었는데 과거와의 결판의 시기가 도래하자 루마니아에 살았던 시절, 젊었던 시절의 파시스트적 사상이 돌연 시사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후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밀란 쿤데라의 표현대로 '치오란의 젊음은 화석이 되었다'(p.203). 연인과의 흑역사와 파시즘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똑같은 정도로 웃고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란 쿤데라는 이런 통찰을 끌어낸다.
얼마 후 나는 치오란이 서른여덟 살 되던 1949년에 쓴 글을 읽었다. “나는 나의 과거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삶을 떠올리는 것 같다. 나는 이 다른 사람을 모른다. ‘나 자신’의 전 존재는 옛날 그 다른 사람에게서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고백한다. “그 당시 내 모든 망상을 다시 생각할 때면 모르는 사람의 강박관념을 연구하는 것만 같은데 그 모르는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나’와 예전의 ‘나’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지 못하고 정체성의 수수께끼 앞에서 경악하는 그 사람의 놀람이다. 이 놀람은 진실한 것일까? 물론 그렇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놀람을 일상적인 모습으로 경험한다. (pp.202-203)
그러니까 치오란은 이미 서른여덟이 되던 해에, 현재의 자신과 그 옛날의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를 느끼고 있었다. 너무 달라진 그녀는 예전의 자신을 떠올릴 때면 '지금으로부터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모르는 다른 사람,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망상과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스스로 그 모습에 경악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그녀의 고백을 믿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의 나와 예전의 나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것에 경악하는 그 놀람"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이 '정체성의 수수께끼' 앞에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진짜 놀람'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대한 치오란의 격노는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준다. 즉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멈춰 있는 사람의 태도도 변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정말이지 이것은 분명하다. 아,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거짓 증거들만 눈에 보인다. 실존적 증거들은 명백한 것일수록 덜 드러나 보인다. 삶의 나이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p.204)"
출생과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로 '시간'이 흐른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그 '시간', 곧 '나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어느 한 시점의 '나'를 이해하려면 다음 관측소 혹은 그 다음다음 관측소에 당도해야 한다. 그곳에서만 밝혀지는 것들이 있다. 거기서만 '예전의 나의 모습'을 '방황'으로 규정하고 바로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젊은 시절의 방황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중적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른다. 스스로가 지금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헤맨다.
"그들은 모두 미지로의 여행의 출발점에 있다. 물론 그들은 방황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방황이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방황하는 것.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 거리를 두고 볼 때에야 방황이 방황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이렇게 거리를 둘 때에만 방황의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 (203-204)
방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적 거리가 필수라면 결국 나이를 먹어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이 든다. 그저 시간이 그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줄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 시간이 지난 후에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시간이 지난다고 모두가 성숙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 경우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나는 같은 시기에 동시에 읽은 노아 루크먼의 <플롯 강화>를 읽으며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