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루이스, <책 읽는 삶>
“You can make everything by writing”. 브런치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문장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브런치 로그인 페이지에 적혀있는 문장이다.
나는 <나니아 연대기>를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다. <반지의 제왕>도 끝내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 일에 ‘절대’라는 것은 없으니 유보적으로 적었다. 혹시라도 아이는 나와 달리 판타지 영화를 좋아할 수도 있고 나의 취향도 바뀔 수도 있으니까(회의적이다).
반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는 말 그대로 ‘환상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그 모든 생각들은 논리적이면서도 상상력이 가득하고, 무엇보다 독창적이었다. 손에 땀을 쥐고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간 책들이다. 그 모든 인용문과 관련 지식은 양적으로만 봐도 놀라운 것인데, 이를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는 데 사용했다는 점이 특히 놀라웠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변증 했다.
C.S. 루이스. 그는 전 세계적으로 1억 부 넘게 판매된 판타지 고전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이며, <순전한 기독교>를 비롯한 상당수의 기독교 사상 관련 작품을 저술했다. 30년 가까이 옥스퍼드 대학의 영문학 교수였으며, 은퇴할 때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다.
그의 기독교 관련 저술은 2000년대 중반에 처음 접했다. 루이스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무신론자로 오래 살다 회심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점이 궁금했다. 위의 3번에 언급한 책들을 처음 읽었을 당시 거의 소울 메이트를 발견한 수준으로 매료되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30대로 접어들며 '나를 관통하는 독서'와는 거리가 한참 멀어졌고,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잊혔다.
나는 약 3~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독서를 다시 시작했다. 작년에 <책 읽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신간을 발견하고 바로 구입했었다. 무엇보다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제목만 보고 있어도 배부르고 등 따스운 느낌이었다. 더불어 맘 속 깊은 곳에 잠겨 있는 오랜 물음표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것은 아니고 그저 ‘기독교인인 내가 책을, 특히 문학을 이렇게 마음껏 즐겨도 되나’라는(그렇다고 안 읽을 것도 아니면서) 물음. 물론 누군가에게는 말도 안 되는 질문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별 수 없이 이런 생각을 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책은, 특히 소설은 인간이 쓴 인간의 이야기이고, 그 인간들은 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신에게 도전한다. 혹은 신의 존재 여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음’을 전제하고 완전히 배제한 세계관의 작품들도 있을 것이다. 그 세계는 손만 뻗으면 되는 가까운 곳에 상주해 있고 나는 자주 그 세계에 몰입하고, 그 세계를 경험한다. 그래도 되나? 이게 내 물음이다. 문학의 세계와 기독교의 세계는 내게 꽤 오랜 화두였다. 한 마디로 ‘책과 신앙’, ‘문학과 기독교’가 '나에게 서로 어떤 관계로' 공존할 수 있는지, 나름의 해결되지 못한 갈증이 있다.
인간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나와 타인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데 책만큼 안전하고 재미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읽는 재미’를 가장 큰 기쁨으로 느끼는 사람인 것도 그에 합당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년 시절 베란다에 담요를 깔아 놓고 요새 안에 들어앉은 듯 웅크리고 책을 읽던 ‘나’, 그리고 지금 매일 독서 중인 나,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정체성은 ‘책 읽는 나’ 일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배경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사실 책을 좋아하고 문학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특히 목차를 보면서 빨리 다 읽고 싶은 마음에 조급증이 날 정도였다.
내 책도 아닌데 모든 꼭지가 소중하게 느껴져서 어느 페이지 하나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그래도 굳이 꼽자면 내게는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와 <나는 진정한 독서가일까?>가 가장 유의미했다.
루이스에 따르면 작가의 신념이 내게는 허위나 부패한 열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현실성이 전혀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즐겁게 타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고, 오히려 '기꺼이' 들어가도 되는 것이다. 작가들 덕분에 나의 존재는 엄청나게 확장될 수 있다. 다 인용해 올 수 없어 생략했지만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는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려 애쓴다. 나 이상이 되기를 원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컨대 루크레티우스나 D.H 로렌스 같은) 타인의 신념 속에 즐거이 들어간다. 그 신념이 설령 허위인 듯 여겨질지라도 말이다. 또 우리는 타인의 열정 속에도 들어간다. 크리스토퍼 말로나 토머스 칼라일의 열정이 때로 그러하듯, 우리가 보기에 부패한 열정일지라도 말이다. 또 우리는 타인의 상상 속에도 들어간다. 그 상상이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말이다.(p.18)
우리 가운데 평생 진정한 독서가로 살아온 이들은 여간해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존재가 엄청나게 확장된 것은 작가들 덕분이다. 좀체 책을 읽지 않는 친구와 대화해 보면 이 점이 제대로 와닿는다. 그는 아주 선량하고 사리 분별력도 꽤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사는 세계는 너무 작다. 우리라면 아마 그 속에서 숨이 막힐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다가 결국 자아 이하가 된 사람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p.21)
나와는 다른 타인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문학적 경험은 나의 개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독서의 특권은 훌륭한 문학을 읽으며 나 아닌 다른 모든 인물이 되면서도 여전히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독서를 통해서 나를 초월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나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적 경험은 개성이라는 특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개성이 입은 상처를 치유해 준다.(...)
훌륭한 문학을 읽으면 나는 천의 인물이 되면서도 여전히 나로 남아 있다.
그리스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나도 무수한 눈으로 보지만,
보는 주체는 여전히 나다.
예배할 때나 사랑할 때, 또 도덕적 행위를 할 때나 지식을 얻는 순간처럼,
독서를 통해서도
나는 나를 초월하되 이때처럼 나다운 때는 없다.
인용문을 옮겨 쓰면서 정리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결국 내가 가진 '그래도 되나?'라는 물음은 복잡한 신앙의 문제라기보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의 문제에 가깝고, 어쩌면 아주 심플한 한 문장의 부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무수한 눈으로 보지만, 보는 주체는 여전히 나"라는, '나'의 존재에 대한 확신.
나는 문학의 세계를 투명한 물에 섞여 드는 형형 색색의 물감으로 여겼나 보다. 문학의 세계는 어쩌면 밝은 밤하늘 일지 모른다. 아주 짙게 검은 하늘, 그 속에서 달과 무수한 별들이 뿜어 내는 광채에 넋을 잃고 한참을 빠져 들어도 틀림없이 해는 뜨고 나는 깨어난다. 나는 물이 아니고, 그저 두 다리로 이 땅을 딛고 서 있는 인간인 것이다. 땅을 딛고 서 있다는 그 확실함이 너무 당연해서 잠시 잊었는지 모른다.
루이스는 스스로가 진정한 독서가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p.23)을 제시한다.
1)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이 즐겁다면
2) 독서 활동을 그 자체로 매우 중시한다면
: 독서가는 책 읽을 시간과 조용한 환경을 늘 찾는다. 그것도 온 심혈을 기울여 찾는다. 방해받지 않고 독서에 집중하는 시간을 단 며칠이라도 박탈당하면 자신이 피폐하게 느껴진다.
3) 내 삶을 뒤바꿔 놓은 책들을 따로 꼽을 수 있다면
: 독서가에게는 어떤 문학 작품을 처음 읽는 순간이 사랑이나 신앙이나 사별의 경험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중대사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의식이 송두리째 바뀌어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 것이다.
4) 읽은 내용을 계속 반추하고 떠올린다.
나는 매년 독서 리스트에 올해 처음 완독한 책과 다시 완독한 책을 구분하여 표시하고 있다.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건 다소 신기한 경험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이해가 바뀌기도 하고.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즐거움을 주는 책은 또 그 자체로의 의미가 있다.
글 <2021년 독서 리스트, 쪽읽기의 나날들>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출산과 육아가 시작된 이후로 내가 반드시 사수하는 건 책 읽을 시간이다. '쪽읽기' 글을 쓸 당시에는 아이 낮잠 자는 시간에 주로 읽었는데, 낮잠 재우기 전에 책 읽을 장소에 미리 책을 가져다 둔다. 이때 마실 커피는 미리 내려 보온병에 담아 두고 찻잔도 준비해 둔다. 읽는 동안 들릴 듯 말 듯 틀어 놓을 음악도 미리 고른다. 공간, 커피, 음악 이 삼합을 말 그대로 나름의 정성으로 세팅한다(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는다). 이걸 만약 삼일 이상 못 한다면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내 삶을 뒤바꿔 놓았다. '성경책'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긴 했지만 나와는 상관없고 장르조차 알 수 없는 '매력 없는 옛날 책'일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기에 그 문장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고 눈물이 쏟아졌다. 점차 나의 '지금'에 영향을 미치는 '현재성'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면서 삶이 바뀌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큰 영향을 준 문학 작품으로는 <자기 앞의 생>, <적과 흑>, <남아있는 나날>,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등이 있다. 비문학으로는 <심플하게 산다>가 있는데 이 책을 읽고 생활의 많은 부분이 변화되고 정돈되었다.
브런치에 읽은 책들에 대해 기록을 해두는 것(내가 읽은 일부의 책만을 기록한다.)은 결국 읽은 내용을 지속적으로 반추하고 떠올리기 위함이다. 아래는 그 외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몇 가지 재미있는 문장들. 추리고 추렸다.
독창성을 갖고 싶다면
독창성을 떠받들어서는 아무도 독창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고, 작은 일에도 그 자체를 위해 최선을 다해 보라. 그러면 소위 독창성이 저절로 찾아온다.(p.134)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는다?
말이 난 김에 말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동시대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작가들의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자기와 직업이 같거나 머리칼 색깔이 같거나 수입이 같거나 가슴둘레가 같은 모든 사람의 책도 읽어야 할 것입니다.(p.136)
진정으로 책을 향유하는 사람
어떤 책이든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언젠가는 좋은 책을 탐독할 수도 있다. 그들은 감각세포가 늘 깨어 있으며 놀라운 감상의 안목이 그 안에 잠재되어 있다. 설령 이 소년이 공상과학소설보다 더 진지한 문학을 끝내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이어지는 인용문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다-옮긴이),
이것을 사랑하는 아이는 적어도 하나의 값진 소득을 거두리니
곧 자신을 잊어버린 경지다.(p.139)
단테 예찬
여태 내가 읽은 모든 시 가운데 대체로 단테의 시가 최고다. 그런데 그의 시의 탁월함이 최고 정점에 이를 때면, 정작 단테가 하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위대한 시가 저절로 써지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기껏해야 시인은 최소한의 역할로 군데군데 살짝 손만 대서 에너지의 방향을 잡아 줄 뿐이고, 대부분은 에너지가 저절로 뭉쳐 절묘한 전개로 신곡을 이루 나간다. 요컨대 시 예술 전반에서 최고 경지는 결국 일종의 물러남이다.(p.156)
글쓰기를 위한 조언
자신만의 문체를 개발하려면 (1) 본인이 하려는 말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2) 만전을 기하여 정확히 그것만 말해야 한다. 우리가 하려는 말을 독자가 처음에는 모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끔 나는 글쓰기란 양 떼를 몰고 길을 가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왼쪽에든 오른쪽에든 문이 열려 있으면 독자는 당연히 아무 문으로나 들어간다.
나는 앞으로도 이 책을 꾸준히 읽게 될 것이다. 나의 다른 활동에 비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이 상대적으로 '덜 실용적이고, 더 사치스러운' 시간인 것 같아 어딘가 한 구석 죄책감이 피어오를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당연한 듯 말해주는 든든한 책이다. 성경과 함께 수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기꺼이 들어갔다가 나와도 된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선배 같은 책이기도 하고. 올 가을도, 이렇게 책을 더 마음껏 사랑해도 되는, 독서가로 살아갈 명분을 차곡히 쌓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