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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Nov 01. 2022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

김영하, <말하다>

우리 집 세 살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만난 작가는 김영하 작가이다. 만났다기보다는 '봤다'에 가깝겠지만.


얼마 전 내가 살고 있는 지방의 아주 작은 소도시에 김영하 작가가 왔다. 바로 집 앞에서 개최되는 행사라 세 살 아이와 함께 산책을 겸하여 찾았다. 야외 행사장이었고, 평소에 늘 한적한 그곳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주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나름 축제 분위기가 났다. 마이크를 든 김영하 작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잠시 펜스 뒤에 서서 강연을 들었다. 더 듣고 싶었지만 아이는 연신 다른 쪽으로 가자고 잡아끌었다. 예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주변의 체험 부스들을 한 바퀴 둘러본 후 평소대로의 루트로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아이는 거실의 책장에서 어른 책을 몇 권 씩 꺼내서 읽는 시늉을 하다가 엄마도 읽어보라고 추천을 해 주기도 한다. 서점 주인과 고객이 되어 일종의 역할 놀이를 한다. 마침 이 날 아이가 꺼낸 책 중에 김영하 작가의 <말하다>가 껴 있길래 책날개에 있는 사진을 보여줬다. "어 이거 오늘 00이가 본 김영하 작가님 책이네" 그랬더니 "응 김영아 자까님, 마이크 들고 있었지"라고 한다. 우리 집 세 살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만난 작가이자 마이크를 든 유명인의 자리는 김영하 작가가 차지했다.




"작가는 작가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끼고는 있던 것들을 포착하여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 준다.

그 주파수가 맞아 나에게 정확히 관통할 때 오는 그 짜릿함이 독서를 결코 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참에 <말하다>(문학동네, 2015)를 다시 읽으며 든 생각이다.

책의 머리에 보랏빛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는 도장을 보니 2019년 4월 19일에 구입한 것 같다. 중간중간 밑줄이 쳐있는 걸로 보아 읽었다는 건 팩트인데 어떤 내용인지가 기억이 안 난다. 글쓰기에 대한 책이었던 것 같은데.. 정도의 어슴푸레한 인상만 갖고 있는 상태. 그래서 마치 새 책을 마주할 때 같은 호기심을 느꼈다. 깊게 몰입하여 대화를 나눌 때 훅 지나가는 시간처럼 속도감 있게 읽혔다.


내가 <쓸모없어도 괜찮아>라는 글을 쓴 것이 19년 1월의 일인데 이 책은 마치 그 글에 대해 조용히 끄덕여주는 일종의 대답 같으면서, 그 이후의 나의 삶의 방향을 담고 있는 듯했다. 분명 말하고 있는 책인데, 뭐야 어디서 듣고 있나? 싶은 그런. 말하는 건 ‘나’이고, 책은 나를 경청해주는 듯한.


19년 4월에 구입해서 높은 확률로 그즈음에 읽었을 텐데 그때는 왜 별 인상이 없었을까를 짐작해봤다. 아마도 그 시기의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는 일종의 생존 본능처럼 알아차렸지만, 막상 이를 쭉쭉 빨아 들일 수 있을 만큼 마음까지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마인드로 받아들이기에는 한 보 이상 앞서 나가 있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마치 귀한 약을 지어먹어도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든 상태에서는 영양분이 온전히 흡수되지 못한 채 대부분이 배설물로 빠져나가 버리는 것처럼.


대략 3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읽으니 이제야 그 약이 제 값을 하는 느낌이다. 저절로 집중모드가 되어 단숨에 쑥 읽어 내려갔다. 특히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었고, 지금은 밀란 쿤데라의 <커튼>을 읽는 중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소설의 영향 그러니까 ‘소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한다’는 문장처럼, 소설은 아니지만 작가의 ‘말’이 내가 모르는 사이 어떤 방식으로든 그동안 내 삶에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지난 3년간 나름 치열하게 고민해 온 내용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약재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았지만 소량의 엑기스는 온몸을 한 바퀴 휘돌며 어딘가에는 흡수된 느낌이랄까.


글을 쓴다는 것은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 우리 자신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기 전까지 몰랐던 것들, 외면했던 것들을 직면하게 됩니다.(p.57)
한 권의 책과 그것을 읽은 경험은 독자 개인에게만 고유한 어떤 경험으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독서를 왜 할까요? 그것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거의 모든 것이 공개돼 있습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 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백 명의 독자가 있다면 백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그 백개의 세계는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읽은 책이 다르고, 설령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기억과 감상이 다릅니다. 자기 것이 점점 사라져 가는 현대에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 (pp.180-181)


직장 생활을 하며 저 밑바닥까지 털릴 대로 털린 내가 왜 다시 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 자기혐오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던 내가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독서를 택한 것이 왜 유효했는지 이미 충분한 설명이 되어 있다. 나도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근사한 사람이 되길 꿈꿔보는 건 덤이다.


'나만의 것'이라는 게 점점 사라져 가는 오늘날 독서와 글쓰기라는 내밀한 행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나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한다. 그런 만큼 지금의 삶, 그러니까 '책 읽는 삶'이 나는 참 좋다. 어디에도 전시되지 않고 오로지 나만 아는 그 시간,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만 같은 세상 속에서 이 보이지 않는 시간의 힘을 믿어 보고 싶다. 다소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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