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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Dec 05. 2022

꼭 결정적인 순간에 쉬가 마렵더라고


나는 몹시 긴장되는 순간에는 아랫배가 싸르르 아파서 당장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어 지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 다른 얘기다.


“아니 꼭 난 결정적인 순간에 쉬가 마렵더라고”


대학원 시절에 옆자리 친구랑 했던 얘기가 오늘 갑자기 떠올랐다. 방금 전이 딱 그런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히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대부분 공부나 글쓰기와 관련된 것들인데, 대학원 시절이나 직장 생활 때나 마찬가지였다.


빈 페이지 앞, 쉬지 않고 깜빡이는 커서는 봐봐 이렇게 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 가고 있어!라는 사인을 보내며 나를 재촉한다. 제목이라도 대충 써보고 진부하게나마 목차라도 작성해 보고 그 안에 이거 저거 끄적여 봐도 뭔가 다 개소리고, 쓸데없는 소리고, 하나 마한 소리인데, 그래도 꾸역꾸역 채워 보고 있는데 그렇게 몇십 분이 지나고 어떤 날은 몇 시간이 지나고 어떤 때는 며칠이 지나가다 다시 보는데, 뭔가가 불현듯 오는 거다. 이거다, 이 방향이다, 나는 지금 이걸 써야 한다!

 

과제를 하거나 논문을 쓸 때, 회사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맞닥뜨리는 나 살았다 싶은 순간. 이걸 잡고 쓰면 나는 뭐라도 되는 것이다. 어찌 됐든 나만의 알맹이가 있는. 대단한 얘기는 아니어도 적어도 내 성에 차는 핵심이 있고, 잡소리는 아닌 의미 있고 말이 되는. 그런데 꼭 그 순간 난 요의를 느낀다.

 

그러니까 이거다 싶은 순간, 드디어 내가 뭘 써야 하는지 감이 잡히는, 기다려온 순간. 그걸 확 쥐고 지금 몰아치듯 쓰면 되는데, 딴짓이 하고 싶다. 뭔가 숨이 차오르는 기분, 얼굴이 살짝 상기되는 느낌. 뭘 해야 될지는 알겠는데 그게 지금 당장 뛰어들어지지가 않고, 그래야 될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요상한 느낌. 당시 그 친구는 정말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복도 끝 테라스에서 담배 타임을 보냈던 것 같다. 난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진짜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러니까 긴 시간의 딴짓이 필요한 게 아니고 3~5분가량의 시간이 필요한 거다. 잠시 숨을 고르고, 너무 다행이고 살았다 싶은 이 기분을 잠시 누리고, 어쨌거나 드릴로 파듯 혹은 불도저로 밀듯 그것을 실행하며 써야 하는 건 나고, 그러려면 뭘 얼마나 해야 하는지 견적이 나오니까 그 앞에서 잠시 쉬가 마려운 것이다. 논문을 쓰든 과제를 하든 보고서를 작성하든 방향을 잡은 건 시작에 불과하고 결국 그 모든 꼭지를 이제부터 나 혼자 채워야 하는 거니까. 시작이 반이지만 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고 끝이 좋으면 다 좋다가 되려면 어쨌거나 끝까지 내가 써야 하니까.


요즘 책을 읽다가 이 느낌을 꽤 자주 느낀다. 와 이 얘기가 나오다니. 이걸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하는데, 너무 짜릿한데, 그만 더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책을 덮는다. 길게는 아니고 정말 담배 타임 정도의 시간 동안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방을 한 바퀴 휘돌고 잠시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화장실도 가다가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사실 그 딴짓의 시간이 완전히 딴생각을 하는 시간은 아니다. 그 기운은 나를 따라다닌다. 그것을 생각하면서도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다. 숨을 고르고 나면 정말 남아야 할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나는 그때 그것을 낚아채서 읽고, 쓰면 된다. 찌릿찌릿 쉬 마려운 이 기분이 좋다. 아주 오랫만에 느끼고 나니 조금은 그리웠다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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