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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Dec 02. 2022

산다, 인생의 엔딩을 몰라서

졌잘싸가 내 엔딩이더라도

포르투갈과 경기하는 월드컵 3차 전이 하필 오늘 자정에 시작한단다. 남편과 나, 세 살 아이는 지난 1차, 2차 경기가 모두 10시에 개최된 덕분에 함께 시청할 수 있었다. 귤도 까먹고, 감자튀김도 먹고, 남편과 나는 물론 맥주도 곁들이고. 아이가 요새 늦게 자긴 해도 11시 정도에는 자는데 12시까지 버티기는 힘든 일이다. 아이는 평소보다 들뜨고 흥겨운 집안의 분위기 탓인지 기어코 안 자려고 버틴다. 암 노는 맛이 최고지. 사실 나도 졸리기 때문에 아이가 자자고 하면 언제든 잘 준비는 되어있다. 그러면서도 이게 또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이겠냐 싶어 우리 일상의 일탈을 허용하는 중이다. 아이는 화이텡, 화이텡 하며 물개 박수도 치고, 삼촌들이 엄청 넘어진다며 선수들을 응원한다.


그런데 경기가 밤 12시에 잡혔다니 이건 아예 볼 수가 없는 시간이다. 아이는 당연히 자야 하는 시간이고 우리도 그 시간까지 버티기에는 다음 날 미칠 여파가 클 것이다. 이제 둘 다 마흔이 넘고 나니 회복이 그리 쉽지 않다. 아쉬운 마음에 토요일에 재방을 보자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남편은 “그래, 하 근데 재방으로 보면 아무래도 그 맛이 아닌데, 아쉽네.”


라이브로 보면 결과를 알지 못한 채 경기를 관람한다. 가나와의 경기에서 전반에 두 골 먹고 2:0이 됐을 때의 그 말문을 잃는 기분, 2:2가 될 때의 그 전율, 그리고 다시 2:3이 될 때의 안타까움의 강도는, 그 모든 희로애락은 생방으로 볼 때에만 가능한 얘기다. 재방을 보게 될 경우에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결과를 알고 본다.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대로, 비기면 비긴대로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볼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절대 예측할 수 없어서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태에서 보는 그 맛은 절대 느낄 수 없다. 난 토요일에 우리가 다른 일정들을 소화하다 보면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재방을 굳이 찾아보지 않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결과 다 나왔는데 뭘. 보면 보고 말면 마는 거지.


스포츠와 인생을 비유하는 얘기들은 차고 넘친다. 새로울 건 없다는 얘기다.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내 인생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어서, 내가 이번에 이길지, 질지, 비길지 알 수가 없어서 너무나 불안하고 초조할 때가 있다. 때로는 겁이 나고 두려워서 꼼짝하기 싫을 때도 있고. 그냥 누가 딱 결과 알려주면 나 진짜 마음 편해질 텐데 싶기도 하고.


아주 오랜만에 나도 모르게 신나서 응원을 하고, 상대 골문 앞에서 사투에 가까운 각축이 벌어질 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며 제발! 을 외치고 있는 나를 보면서(평소에 그렇게 축구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우리 선수들에게 가해지는 위험한 태클에 화가 나고, 상대편의 득점에 허탈해하기도 하고, 빗나간 슈팅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는, 그런 희로애락의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보며 느낀 것은 그게 그냥 인생의 맛이라는 거였다. 결과를 몰라서 느끼게 되는, 몰라야만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함이 결국 나를 살게 하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를 아는 순간, 굳이 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한창 우울증 증세가 심했던 시절, 사는 게 살 떨릴 만큼 두렵고 동시에 끝없는 터널처럼 길게 느껴져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죽고 싶다와는 좀 달랐다. 생에의 의지가 약해졌던 것이지, 죽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건 아니었다. 끝을 모르니까 고통도 슬픔도 내 살갗을 도려내듯 아프다. 언제까지 이 고통이 계속될지 모르니까. 결과를 모르니까 나는 더욱 생생히 기뻐하고 사랑한다. 지금 순간은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까. 그게 그냥 사는 맛이다. 살아 있으니까 맛을 느끼고, 내 인생의 엔딩을 모르니까 단 맛도 쓴 맛도 신 맛도 매운맛도 그토록 강렬해진다.


엔딩을 모른다고 지금의 기쁨과 행복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 또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모르니 내 기쁨의 기저에 무슨 불행의 전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패턴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 그저 지금 눈앞의 경기에 몰입하고 있는 선수들처럼 나도 내 인생에 몰입하면 그뿐이다. 졌잘싸가 내 엔딩이더라도 억울할 건 없다. 그 모든 문학이 그토록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는 건, 패배가 우리 대부분의 결말이기 때문 아닐까. 그래도 끝까지 잘 싸우는 것, 그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고 숭고함일 것이다. 저 먼 깊고 아득한 바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상어들이 밤중에 달려들면 이제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한다?

“싸우는 거지, 뭐” 노인은 말했다.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야.”*


*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인규 옮김, 문학동네, 1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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