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시작하면 생각보다 빨리 나아진다
유년 시절의 좋은 기억이 많지 않다. 나에게는 나쁜 일이 더 많았을까? 아니면 나쁜 기억이 더 선명하게, 오래 남는 걸까? 불안했던 유년시절과 그 불안함이 기저에 깔려있으나 의식하지는 못한 채 보냈던 30대 후반까지의 시간들.
30대 후반부터 임신 - 출산 - 육아를 거치며 불안함이 아주 오랫동안 나의 일상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쳐왔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다소 정상 범주를 넘어선 두려움, 불안, 부정적인 생각회로로부터 과연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이 상태로는 건강한 마음으로 아이를 보살필 수 없을 것 같아 나름 절실한 마음으로 노력했다.
내 불안의 근원을 알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 했다. 불안은 일종의 하위 카테고리이고 '나'라는 전체를 먼저 이해해야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할 것이었다. 나를 아는 데도 정성이 들어가고 연구가 필요했다. 꾸준한 정성을 기울여 어느 때보다 몰입되어 깊이 탐구했다. 아이를 키우고 나에 대한 공부를 하며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보다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불안은 여전히 내 삶 한편에 있지만, 편안의 자리가 더 크다.
희망적인 건 생각보다 변화가 빠르다는 것이다.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프로그램을 보다가 종종 신기한 게 있었다. 건강이 나빠지는 데는 정말 오랜 시간 걸려 나빠졌는데 대게 짧게는 3주 정도면(길게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빠진 세월에 비하면 짧은 것 아닌가) 주요 건강 지표들이 유의미하게 개선된다는 점이다. 마음도 비슷하다. 내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병들었다 하더라도 생각보다 빨리 방향 전환이 된다. 물론 식이조절을 하고 운동을 하듯 개선을 위한 나름의 처방과 그에 대한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려면 일단 나를 좀 벗어나야 한다. 40년 살아봐서 나는 내가 제일 잘 알거든이 아니라 “내가 누군지 나는 아직 모른다.”라는 생각으로 창문을 열고 환기시킬 때처럼 귀와 마음을 활짝 열어 보는 거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건 오히려 좋은 신호탄이다. 비로소 나를 찾으러 출발할 수 있는 여정의 시작. 뭐가 필요한지,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자꾸 회피하고 미루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 카드대금처럼 쌓여 결국 커다란 값을 지불하게 된다. 한 번은 정면으로 마주해 보겠다는 마음,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이라는 과제가 0순위의 중요성을 갖는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게 해결되지 않고 다른 것들 통해 일시적으로 위안을 얻거나 잊어봐도 결국 미해결 된 문제는 나의 인생에 자국을.. 흑역사를 남긴다. 흑흑. 내게 확실하게 도움이 됐던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읽고, 생각하고, 쓰기
: 책은 나를 벗어나 다른 인물이나 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방법 중 하나다. 책을 세심하게 선정하여 읽어나가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는 독서가 가능하다. 그만큼 나의 세계도 천천히 넓어진다. 읽고, 필사하고, 깊이 생각해 본다. 깊이 생각하는 데는 쓰는 것도 도움이 된다. 나의 본성, 나의 인생에 대해 공부하고 탐구하고 연구한다는 자세가 스스로 만족스럽기도 하고 꼭 필요하기도 하다. 실제로 무언가를 깨닫고 배우게 된다. 머리를 쓰는 재미, 깨닫는 기쁨과 성취감이 있다.
2. 일기와 기도
: 새벽에 나의 생각들을 내적 검열 없이 쓴다. '자기 검열 없이'가 포인트인데, 이게 생각보다 나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매일 한 줄이라도 일기를 쓰다 보면 제자리에서 맴맴 도는 생각을 벗어나 조금씩 정리가 되고 속이 트이는 기분이 든다. 마음 밭을 솎아 내고 솎아낸다. 기도도 같은 맥락이다. 뼛속까지 진실되게 기도하려고 노력한다. 쉽지는 않다.
3. 작은 것에서부터 나다운 선택을 쌓아가기
: 무엇이 나다운 것인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 내가 무엇에 영향을 받아 이런 결정을 하려고 한 것인가? 순수하게 나의 생각인가? 누군가에게 보이려는 것인가? 여러 질문을 던져보고, 남들한테 보이거나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정말 좋아서, 설령 남들이 잘하지 않는 선택이라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연습을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다 보면 점점 더 자신감이 생긴다. 나의 경우는 큰 선택 한 번이 결정적인 터닝포인트가 됐다. 그 선택에 내가 책임을 지면 되고 그러한 리스크를 감수하며 일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이것과 함께 걱정이나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생각을 다루는 것도 동시 진행이 필요하다. 두 문제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몸처럼 굴러가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실천했던 건 아래 세 가지 정도이다.
1. 생각회로 바꾸기
: 자동반사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보통의 나는 그 생각을 방치했다. 그러면 정말 생각이 끝까진 가면서 나는 움츠러들고 위축된다. 사람의 마음이 쪼그라드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파리채로 때려잡듯이 치워보기로 했다. 의식적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떨쳐보기도 한다. 효과가 있다. 부정적인 생각이 먹구름처럼 순식간에 나를 뒤덮으려 할 때는 싹둑 흐름을 끊는다. 아름다운 것, 맑은 것, 좋은 것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춘다. 꽃병의 꽃을 자세히 바라보기도 하고,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좋았던 음악을 틀기도 하고, 식탁이나 테이블 위를 단정하게 정리하거나, 밖으로 나가서 걷는 등 분위기를 좀 바꿔 그 생각들로부터 벗어난다. 혹은 일부러라도 긍정적인 흐름으로 생각을 전개시켜보기도 한다. 나의 뇌 속에 새로운 길을 뚫는 마음으로 말이다. 완전히 새 길로만 다닐 수는 없지만, 선택지가 생긴다.
2. 부정적인 회로로 이끄는 것과 거리 유지하기
: 나를 잘 관찰해 보면 특유의 생각 회로로 이끄는 상황이나 인물이 있다. 그것과 가급적 철저하게 거리를 둔다. 내가 낫는 동안 나를 보호하는 것도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노출된 상태에서 뭔가를 극복하는 건 쉽지 않다.
3. 산책
: 따로 시간을 내 운동까진 할 여유가 없기도 했는데 그럴 땐 틈틈이 걷는다. 정신 건강에 당연히 체력이 중요하기도 하고, 걸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 자체가 우리 뇌에 여기를 벗어나 미래로 향하는 착시 비슷한 것을 준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나의 인생을 다각도로 정리해 보면서 삶을 한 번 이삿짐 정리하듯이 깨끗하게 털고 가는 것인데 이는 어쩌면 리모델링, 어쩌면 재건축에 가깝다. 거의 다 철거하고 다시 세워나가야 하는. 대신 한 번 확실하게 하고 나면 그야말로 천릿길의 한걸음을 ‘제대로 한 발짝 뗀’ 시작이 된다. 돌아가는 지름길 같은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짓는 작업에 집중하는 시간 동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다고 그동안 일상의 문제들이 뭐 다 나를 친절하게 기다려 주느냐, 절대 아니다. 나에 대한 공부와 생활의 문제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해 나간다. 재미있는 것은 그 와중에 이전과는 다른 기준으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게 내 삶의 방향을 미묘하게 조금씩 바꾼다. 물건 하나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쌓이면 커다란 흐름으로 이어지고, 내가 바뀌어간다. 그럼 정말 다른 세상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지 싶은. 외로움의 시기가 지나가고, 고독이 벗이 되며, 새로운 세상과 사람들을 만나며 감사하게 되는 시기가 거짓말처럼 찾아온다.
나만의 좁고 깊은 우물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내가 얼마나 작은 세계에 갇혀 있었는지 깨닫고 경악했다. 그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가지지 않는다. 가고 싶지도 않고, 갈 수도 없다. 시작이 반이 아니라 어쩌면 시작이 전부다. 조금은 냉정하게 시작해 보는 자기 연구를 하다 보면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재미도 있고 자기 자신의 '전문가'가 된다는 성취감도 갖게 된다. 관계에서의 자유함도 찾아온다.
본질부터 개선하는 것에는 분명 고통과 아픔이 뒤따르지만, 응당 가치가 있으며 확실하게 나아진다. 나를 알게 되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해진다. 여전히 때때로 겁이 나고 불안하지만 건강하게 다스릴 수 있는 나만의 방법도 생긴다. 이 글을 읽을 누군가의 새로운 여정에도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길, 이내 곧 자유롭고도 편안한 마음이 되길 기도한다.
그대의 눈을 안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여태껏 발견 못하던 천 개의 지역을 찾아내리라.
그곳을 답사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학의 전문가가 돼라.*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474면, 은행나무(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