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꼬마 Jan 18. 2021

심각하지 않게 CIA를 보는 법

영화 <스파이> 를 보고

  모든 게 완벽했다. 시간을 때울 무언가가 필요했고, 마침 DVD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고, 얼마 전부터 그 영화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을 텅 비워도 날 웃을 수 있게 만드는 몇 안 되는 나의 영화, <스파이>였다.

영화 <스파이> 포스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특별하게 좋아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생각이 나는 영화다.

(문득 지금 생각해보니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웃음 요소는 대부분 야한 농담에 있다. ‘미국에서는 실제로 저런 농담을 자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의 모든 장면들에는 야한 농담들이 들어가 있다. 평소 내가 개방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저런 농담을 실생활에서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순식간에 유교걸이 될 것만 같은 수위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음담패설을 듣고 나면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것인지 헛웃음이 나올 정도지만 어느새 그냥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농담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도 재미있고, 거의 모든 신들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영화의 정석이라는 느낌. 원래 말장난 개그보다는 슬랩스틱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주인공이 물티슈를 씹어먹는다거나, 무대에서 마이크로 동료의 이름을 부른다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시멘트 반죽에 처박히는 등-아마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 장면들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올 것이다-의 영상 위주의 웃음 요소에 많이 웃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장면들이 무슨 장면인지 궁금하다면 당장 <스파이>를 틀어서 보는 것이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주인공인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의 매력은 찾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녀의 용감한 도전들 혹은 애절한 사랑, 은근한 배려심 등. 특히나 그녀가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과 거친 입담으로 레이나(로즈 번)를 제압할 때 그녀의 멋짐 수치가 과다해짐에 따라 이 부분에 매력을 느끼는 관객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나는 전혀 다르다. 그녀가 그렇게 용감하고 대담한 행동들을 하고 난 후 본인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딱 들어왔을 때의 그 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콩닥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며 떨리고 불안해하는 그 모습이 나로 하여금 수잔의 매력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원래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그녀가 스파이가 됨에 따라 대담한 일을 펼칠 수 밖에 없게 되는 과정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레이나의 제압을 위해 뛰어난 싸움 실력과 거친 입담을 뽐낸다. 자신이 스파이라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런 태도를 계속 보이던 수잔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 불안해하곤 했다. 초반에는 그녀의 그런 소심한 성격에 대해 인지할 수 있도록 종종 비춰주며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행동에 대해 ‘어머나’하는 반응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그녀의 스파이적 면모가 드러나는 장면들이 많아지면서 그녀의 본래 성격은 관객의 안중에도 없게 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잊고 있었던 그녀의 성격에 대해 말해주는 장면이 훅 치고 들어오면 그녀의 그런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임기응변을 하고, 상황을 종료시키는 그녀의 엄청난 능력이 더 부각되어 보인다. 스파이 수잔-혹은 캐롤 젠킨스, 페니 모건, 앰버 발렌타인-의 모습이 아닌 인간 수잔으로서의 모습이 확실히 보여질 때 나는 그녀의 매력을 더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번 시청으로 인해서 새롭게 느끼게 된 부분도 있다. 바로 브래들리 파인(주드 로)이 생각보다 막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다는 점. 분명 지난번 볼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파인은 자기 좋아하는 여자 마음 이용해먹는 세상 제일 나쁜 놈이었다. 그런데 이번 느낌은 조금 달랐다. 초반까지는 비슷했으나 후반으로 가자 혹시 그가 정말로 수잔의 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인이 수잔을 정말 ‘남 부탁 잘 들어주는 미련하게 착한 동료’로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내가 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마지막에 파인이 수잔에게 ‘그 말 진심이었냐’고 물을 때였다. 정말 수잔을 동료로만 생각했는데 수잔의 진심을 듣고 수잔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영 착한 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캐릭터지만 그래도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로맨스의 꼬투리를 잡자 조금 기분이 좋았다. 물론 마지막에 반전이 있지만. (뭔지 궁금하시죠? 제발 영화 봐주세요)



  내가 기분이 좋아지고 싶을 때 보는 영화는 내가 작품적으로 좋아하는 영화와는 크게 상관없이 두 편이 더 있다. 오늘 이 영화의 감상문을 쓰면서 내가 아끼는 작품에 대한 마음을 글로 잘 소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한번 새삼 느끼긴 했지만 만약 기회가 된다면 저 두 영화도 언젠가는 소개하도록 하겠다.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나 된다니 난 역시 행복한 사람인듯 하다. 앞으로는 더 늘어날 것도 같아 더 행복하다.



*사진 출처 : 영화 공식 포토

매거진의 이전글 연애가 처음인 게 죄는 아니잖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