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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꼬마 Jan 11. 2022

'사랑 받는 일'에 대한 확신

영화 <로마>를 보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진지하게 생각한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만큼 내가 행복할 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받지 못하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만큼 불안할 때도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 행복함과 불안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제공한다.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는 부유한 가정의 멕시코인 가정부다. 어떤 서사 내에서 ‘인종이 다른 피고용인’이라는 설정은 독자에게 불안함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나이브스 아웃>의 마르타처럼.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 버림받을지 모르는 부유층의 선민사상과 이기주의에 피해를 입는 자들. 클레오도 저렇게 버려지진 않을까, 결국 그들에게 고통받지 않을까, 하는 불편함에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클레오에게 고통을 준 이는 그녀와 같은 인종의 남자친구 페르민이다. 사랑을 했고, 사랑받았다고 생각했지만 페르민은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사랑했던 적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녀의 고용인인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는 종종 화를 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를 한 번도 아끼지 않은 적이 있었을까, 하는 확신을 불러일으킨다.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받은 후 클레오가 한 첫 걱정은 ‘해고’였다. 임신해버린 자신이 피고용인으로서 가치가 있을지 좌절한다. 그럼에도 클레오는 소피아에게 그녀는 자신의 상황과 걱정을 여과없이 드러내었고, 걱정과는 다른 소피아의 반응과 함께 그녀는 그렇게 또 한 번 사랑을 확인받는다.

  서툰 운전 실력에도 클레오를 산부인과까지 데려다준 소피아 또한 클레오가 진료를 받는 동안 자신의 사랑에 대해 고민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클레오에게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걸 보고 난 후 클레오는 신생아실에서 자신의 동생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아이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는다. 자신의 문드러진 사랑과 소피아의 버려지는 사랑 속에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하다. 지진이 나고 콘크리트 더미가 가득 쌓여 위태해 보이는 인큐베이터 속 신생아를 빤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사랑을 봤을까.



  곧 아이를 낳을 클레오를 위해 직접 가구점에 데려가 아기침대를 구매해주려 하고, 여행에 아무런 일도 시키지 않겠다는 다짐 하에 클레오를 데려가는 소피아네 가족의 행보를 보며, 그 누구도 저들의 사랑을 의심하지 못했을 테지만 바다에서 소피아의 아이들이 목숨을 위협받던 순간, 관객은 또다시 소피아의 사랑을 의심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저 아이들이 저대로 죽는다면 소피아의 분노는 어디를 향할까, 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간절히 그 아이들이 죽지 않기를 바랬을 것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무사 구출되었지만 그러고 나서도 '아이들이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막지 않았다’는 질타가 혹여 클레오에게 향할까 봐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결국 그들이 집에 돌아가는 차에서 평화롭게 창 밖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고 나서야만 편히 영화를 보게 된다. 그렇게 또 사랑이 버림받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은 결국 영화가 마무리되기 직전까지도 나를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굳건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내가 너무 우습게 판단했던 탓일까, 나는 영화가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참 우스운 감상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웃음이 난다.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찾은 것처럼 보인 그녀들이 사랑에 있어서 이제는 덜 방황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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