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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꼬마 Aug 15. 2021

선과 악, 그 사이 어딘가

영화 <미션>을 보고

  선과 악의 기준은 항상 모호하다. 만약 내가 살인을 행함으로써 어떠한 가치를 이룰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일까. 사회가 정한 선과 악의 기준이라면 나는 살인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항상 나를 법적으로 보호했다. 만약 모두에게 해가 되는 범죄자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거절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문득 깨닫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고도 사회적으로 범죄자가 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는 그 범죄자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영화에서도 그런 대립이 존재한다. 내가 앞서 말한 주제와는 상당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지만 두 선교사는 각각 무력과 사랑의 편에 서서 대립한다. 이는 둘 다 모두 타당하기에 그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교리 중 제일은 ‘사랑’이라는 가브리엘 신부는 무력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고, 그렇게 행하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로드리고 신부는 그렇게 했다. '기득권의 필요에 의해 학살되는' 그들을 보호하고,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무력과 살인을 마다치 않는다.



  나는 로드리고의 편에 섰다. 만약 내가 독실한 종교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가톨릭의 제일 기본적인 교리는 ‘사랑’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력과 사랑은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수평선 같은 존재다. 로드리고는 과거에 무력의 편에 서고나서부터는 엄청난 후회와 함께 항상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을 (당시 법으로서는) 합법적으로 죽이고서도 죽을 날만 기다리며 자신의 죄를 자처하기까지 했다. 이는 그가 다시는 무력의 편에 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그는 결국 무력으로 돌아온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하기 위해 나서지 않은 가브리엘의 입장도 백번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뻔뻔하게 ‘필요한’ 학살을 저지르는 유럽인들에 대항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이라는 가치를 바라보고 있기에는 당장 죄도 없이 죽어가는 과라니족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명장면으로 과라니족의 아이가 다시 주어온 칼을 들고 칼 연습을 하는 로드리고의 모습으로 뽑고 싶다. 자신이 지금까지 굳건하게 믿어오던 신념들을 버리고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과거의 상처를 마주 보는 것. 그것보다 멋있는 모습이 어디 있으랴.



  선과 악의 모습은 항상 변화한다. 정식적인 결투였다는 이유로 동생을 죽인 로드리고가 무죄가 되었듯이. 국왕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죄 없는 과라니족의 학살이 정당한 일이 되었듯이. 선과 악의 모습이 변화하는 것은 참 신기한 것 같다.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지 이 영화 한 편만 보고도 예상할 수 있다. 과라니족 아이를 보고 짐승이라고 말하고, 학살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대사를 보고 가슴이 먹먹하다. 지금에 오기까지 흘렸을 피가 그들은 죽인 모두를 잠기게 하고도 남았을까.



  첫 문단으로 돌아가 보자. 만약 내가 저 당시 어떤 범죄자와 ‘정당하게 결투’를 해서 그 범죄자를 죽일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있었다면 나는 어떤 행동을 행했을까. 아마 나는 당시의 ‘선’을 행했을 지도 모른다. ‘악이 아닌 살인’. 즉, 선과 악의 기준이 바뀐다면 나는 현재 추구되는 악을 선으로 믿고 행하게 될 것이다. 법이라는 것, 선과 악의 기준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고 무섭다. 단지 법만으로 선과 악이 나눠진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목숨에 급이 나눠진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람을 죽이고도 뿌듯해할 수 있다는 것. 조금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말을 듣고 결말을 예상했다. 결국 과라니족이 무력에 있어서 승리하지는 못할 것,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들이 투쟁하고 싸우고 있을 것이라는 결말 또한. 무척 차갑다. 실화라는 것이 이렇게 차가운 단어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사실 영화적 결말도 기대했다. 과라니족이 유럽인들에 대해서 승리하는 장면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들은 강한 의지와 믿음, 신념만을 보여주고 몰살당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신부의 신분에서도 기꺼이 총과 화살과 칼을 들었던 신부들마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랑만을 행하며 아무런 무력을 행하지 않은 채 끝까지 사랑했던 가브리엘마저.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악이라고 정의되어진 그들은 당당했다. 결국은 선이 승리하는 거라면 선은 누구일까. 결국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신부들이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작은 팔로 배를 밀며 어디론가 떠난 그 작은 아이들이 지금은 결국 어떠할지, 그것들이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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