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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꼬마 Jun 16. 2021

대충 살자. 사실은 열심히 사는 것이지만.

영화 <소울>을 보고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대한민국은 <신과 함께>, 멕시코는 <코코>와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다른 질문도 해보겠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종교에 따라서, 신념에 따라서, 혹은 각자가 가진 상상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디즈니와 픽사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바로 ‘유세미나’, ‘태어나기 전의 세계’다.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태어나기 전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 기대가 컸다. 태어나기 전의 세계 속 사람들은 아이 같을지, 어른일지. 태어나고 싶어할 지, 아니면 그러고 싶어하지 않을지. 후자의 생각에 이르자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만약 현재 이승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의 세계’로 가 자신의 탄생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중 기꺼이 지구로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 했다’라는 농담이 섞인 진담을 종종 듣곤 하는 현대인으로서 자신의 탄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위험해보였다.


  다행인지 아닌지 유세미나의 영혼들은 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팔다리도 채 없고, 성격조차 형성되지 않은 거의 無의 존재들이었다. 자신의 성격이 형성된 후 지구로 갈 수 있는 마지막 티켓인 자신만의 ‘불꽃’을 찾고 나면 모두 망설임 없이 지구로 향하는 루틴을 밟고 있었다. 단 한 영혼만 빼고.


  바로 수천 년 동안 유세미나에서 지내온 22번 영혼이다. 링컨, 조지 오웰, 테레사 수녀 등의 훌륭한 이승 멘토들을 만나왔지만 애초에 지구에 가고자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아 불꽃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특이한 영혼이다. 지구 같은 따분한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22에게는 그가 유세미나에 있던 시간들을 보여주는 것처럼 다른 영혼들에게는 없는 팔이 존재한다. 바로 이 영혼이 내가 앞에서 걱정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 했다’라는 일부 현대인들의 마인드를 벌써부터 겪고있는 어린 영혼이 되겠다.


  하지만 이 영혼이 지구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는 계기가 바로 이 영화의 메시지가 된다. 22가 찾지 않았던, 사실은 찾지 못했던 그 불꽃이라는 것은 지구로 간 후 그 영혼이 살아가는 ‘목적’이 될 요소가 아니다. 그냥 지구로 갈 준비가 된다면 그 불꽃은 채워진다.


  “하늘을 보거나 걷는 건 목적이 아니야. 그냥 사는 거지.”


  하늘을 보거나 걷는 것이 자신의 불꽃일지도 모른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말하는 22에게 가드너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저렇게 말한다. 마치 사는 이유가 존재하고, 그 이유만을 위해 사람이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마치 ‘무언가를 위해’ 살아간다고 느낀다. 취업을 위해, 혹은 부자가 되기 위해 등. 하지만 우리가 지구로 온 것에 대해 어떤 특정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냥 하늘을 보거나 걷는 것,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는 것, 단풍나무 씨앗을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사실 살아갈 이유가 충분한 것이라면? 불꽃은 여기에서 채워진다. 내가 어떤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가 살아가는데에 있어 생겨날 모든 일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즐길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불꽃을 채우고 지구로 온 것이다. 22가 하늘을 보거나 걷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지 않을까, 라고 착각했듯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가드너는 ‘그냥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냥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 했다’는 현대인들은 어쩌면 자신이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날들이 무의미한 나날들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유세미나의 기억은 사람들에게 없다지만 자신이 도대체 무엇에 불꽃을 느껴 지구로 오고자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하늘을 보거나 걷는 것, 이야기를 나누거나 멍을 때리는 것 등 이 세상의 모든 매력적인 일들에 대해 이것들이 내가 지구로 오고자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내가 잘하는 것이 없다고 자신을 지탄하지 말고, 그냥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목적이 되도록.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느낀 채. 음악으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가드너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지하철에 앉아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거나 식당에 홀로 앉아 음식을 먹는 등의 모든 순간에 자신은 그저 살아가고 있었고, 어쩌면 즐겁고 행복했다는 것을. 즉,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하고있지 않았다고 해서 무의미한 삶을 살고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이미 바닷속에 있으면서 바다를 찾아 헤매는 어린 물고기처럼 우리는 이미 그 삶 자체에 있으면서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밥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고, 길거리에서 길고양이와 인사를 하고, 집에 가는 길 버스 창 밖의 노을을 보며 우리는 어쩌면 매순간 행복하게 ‘그저’ 살아간다. 내가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다고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만 애초에 우리 삶에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할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데 무엇이 무의미하다는 말인가. 대충 살자. 테리와는 이야기를 끝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테리가 한눈 파는 사이 속임수를 쓰는 귀여운 <소울> 속 제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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