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영화는 반전이 존재하는 영화이므로 이를 알고자 하지 않는 분들은 영화를 보고 와주세요 :)
영화 초반부터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설정이다. 예쁜 간호사가 그저 그런 환자에게 거는 대시라니. 외모에 대한 비하는 아니고 아무런 상호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인물 사이에 특정한 서사가 부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적으로는 쓰이기 힘든 설정이라는 뜻이다.
영화가 끝날 때쯤 둘 사이에 있는 특별한 서사가 무엇인지 밝혀진다. 그때 우리는 이 설정이 극히 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인다.
장혁(장기용)과 다은(채수빈)의 관계는 흔했다. 서로 죽고는 못 사는 여느 젊은 커플들처럼 사랑했다. 서로의 삶에 차지하는 공간들이 많아지며 행복한 기억도, 그에 따른 서운한 일들도 서서히 많아지는 권태의 시간이 다가왔고 이는 몸이 멀어지는 시기와 맞물렸다. 결국 그들은 이를 이기지 못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던가. 딱 그런 느낌이다. 일에 치여 몸도 마음도 힘든 때에 연애로도 그를 치유 받지 못하는 다은은 이장혁(이우제)을 보고 무언가 데자뷔를 느꼈을까. 이 사람에게 어쩌면 ‘혁이 오빠’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장혁 또한 연애도 일도 편하게 흘러가는 것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뜻이 떨어지는 보영(정수정)에게 마음을 준 것일지도. 일에 치여 연애가 망가지고 마는 청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흔한 관계를 새로운 형식으로 보여주었다.
장혁(장기용)과 다은(채수빈)
이 영화에는 큰 선역도, 악역도 없다. 항간에는 장혁을 탓하는 말이 많지만 사실 다은과 장혁 사이에 잘못을 구분한다면 높낮이가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둘 모두 <노팅힐>이나 <러브 액츄얼리>에 등장하는 로맨스 영화형 인물들이 아닌 현실에 존재할 것만 같은 허점투성이의 인간들이기에 그저 서로에게 배려가 부족했다. 그들이 그런 인간들이었던 덕분에 서로가 서로를 조금 더 배려했더라면, 이라는 ‘If’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에 집중하면 사랑이 멀어지고, 사랑에 집중하면 일이 멀어지는 악순환 속에서 청춘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속에서 눈에 보이는 사랑에 넘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장혁 뿐이라는 것을 억울하게 보는 관객들도 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영화 속에서 굳이 빌런이 있다면 보영 정도다. 하지만 이는 그녀가 이 이야기 속 조연이었기 때문이라는 전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녀가 이 이야기의 주연이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기업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강한 희망 아래 파견직으로 밤을 새서 일을 하지만 제대로 풀리는 것이 하나 없는 상황. 그 속에서 유일하게 동맹 관계가 되어주는 장혁이 그녀에겐 이 험난한 생활 속 유일한 힘이 되었다. 능력도 있고, 적당한 매너도 있는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쩌면 나약한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끝나버린 보영은 더 이상 장혁에게 의지할 이유가 없어졌다. ‘대기업’이라는 한 체제 안에서 힘을 내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기 좋은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제 대기업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는 그녀로서는 굳이 장혁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마음 먹었고, 장혁은 툭하면 끊어져버릴 애정의 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마침 그 애정을 툭 하고 끊을 수 있게 도와준 장혁의 갑작스러운 프러포즈 덕분에 그녀는 그를 툭툭 털고 잊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유학 생활 중 피식하고 떠오를 그런 기억 정도, 그렇게 남을 테니까. 결국 보영도 험난한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다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해진 그런 나약한 사람, 그런 흔한 사람이었다.
장혁(장기용)과 보영(정수정)
결국 대기업 정규직도, 원래의 사랑도, 새로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도 모두 잃어버린 장혁은 어떻게 될까. 장혁은 어디서부터가 잘못이었을지를 생각한다. 그 생각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다가오는 탓에 관객들도 함께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절대로 시원한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이다. 일과 사랑을 모두 잡을 수 있다는 말은 현실 청춘들에게 정말 드라마에나 나오는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대기업 정규직을 포기할 수도, 그 반대가 되기도 어려운 게 진짜 현실이니. 장혁은 어떤 상황이든 대기업 정규직을 위해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삶에서 연애의 비율을 줄여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삶의 퍼센트는 언제나 100으로 정해져 있으니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줄여나갈 수 밖에 없다. 그 상황 속에서 바람을 핀 것은 잘못된 행동이었지만 명확하게 장혁과 보영이 바람을 피기 시작한 순간부터가 잘못된 순간이라고 정의하기에는 영 찜찜한 구석이 많다. 결국 안 될 인연이었던 것이다, 장혁에게는. 다은도, 보영도,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도.
이야기 자체는 특별하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특별할 수도. 일과 사랑을 모두 잡는 로맨스 영화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으니까. 영화에서는 특별하고, 현실에서는 평범한 이야기이다. 이렇듯 기존의 사랑의 분화와 결합을 다루는 기성의 이야기와 달리 평범하지 않은 형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무려 관객들을 속이고자 노력하는 그 포인트를 봐서라도 인상적으로 시청할 수 있는 영화가 될 수 있음은 확실하다. 원작이 있는 영화라지만 어디서도 보지 못할 것 같은 반전을 지니고 있으니 흔해 빠진 로맨스 영화가 질려가는 분들은 보시길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