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자살가게>를 읽고
창 밖을 보면 사람들이 낙엽 떨어지듯 떨어지는 세상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슬프거나 지치는 일이 생긴다면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삶. 이런 삶은 쉬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 없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들로 죽음을 결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누군가 괴롭혀서, 원하는 만큼의 성취가 나오지 않아서,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더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해서.
마지막의 경우는 참 아이러니하다. 이 자살가게를 찾은 손님 중에서도 이런 손님이 존재했었나?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너무나도 힘들어 죽겠다고 결심한 손님. 내가 사용한 이 '아이러니'라는 단어는 그런 고통을 쉽게 보겠다는 의도로 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떠나가는 아픔을 아는 이들이 그 아픔을 다시금 생성하고 떠난다는 그 구조가 모순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죽고 싶다는 의지를 가진 이들은 결코 타인의 고통까지 고려할 수 있을 만한 상황에 있는 이들이 아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저 세계에는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많다. 자살 성공률이 높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죽고, 죽고, 계속해서 죽는다. 그 죽는 사람들 중에 죽고 싶어하는 계기가 '타인의 죽음' 때문인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된다면 저 세계에서는 더이상 자살자가 나오지 않는 것을 기대할 수가 없다. 죽고, 그 사람 때문에 죽고, 그 사람 때문에 또 죽고, 악순환에 악순환에 악순환인 세상. 작가는 그런 자살의 악순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살아가는 사람보다 죽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은 저 세상이 그러에도 유지가 되는 것은 생명의 행복을 아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해 자살가게를 운영하는 튀바슈 가문도 대대로 가문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현재 자살가게의 주인 부부조차도 (원치 않은 아이였던 알랑까지 포함하면) 무려 3명의 아이가 있다. 죽음을 팔지만, 그들 또한 새 생명을 만든다. 그들은 생명의 행복을, 일상의 소중함을, 대화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그 세상의 사람들이 생명의 행복을, 일상의 소중함을, 대화의 즐거움을 인지하고 살았더라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소설의 끝자락에 그들은 그렇게 변화한다. 모두가 힘 쓰고 노력해서가 아닌 단 한 명의 사람 '알랑'이 해준 것처럼. 그것들을 그들의 삶에 좀 더 일찍 적응시켰더라면 뭔가 달라졌으리라 굳게 믿는다.
이 섬뜩하고 요상한 가게에 유일하게 인상적이었던 점이 있다면, 자신에 대한 파괴권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주었다는 점이다. 타인을 파괴하는데 쓰이는 것을 막는다. 오로지 '자살'에만 쓰이도록. '살해' 등에 쓰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이 '자살'을 하겠다며 도구를 사가 타인을 파괴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도구에 대한 수익이 발생하니 자살가게 사람들에게 손해는 아니겠지만, 그들은 이를 막는다. 참 신기하다. 모든 생명을 무력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파괴하고자 마음 먹은 이들에게만 생명의 무력감을 선사하는 그들의 가치관이 참 재미있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복용혐의로 재판 받을 때 변호를 위해 한 말이라고 한다. 맞는 말일까 싶다가도, 한 사람이 죽으면 그로 인해 몇 사람이 파괴되나,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이 <자살가게>를 읽고 있노라면 죽음에 대해 점점 무뎌지는 것이, 그 고민 시간을 덧없도록 우습게 만들어 생각을 그만 둔다. 다만, 이 책의 결말을 읽고 나면 저 고민에 대해서도 일종이 답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며 글을 줄인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