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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 Jan 24. 2019

아기를 낳고 많이 울게 되었다

상상하지 못한 세계의 광막함

* 작은 변명: 육아의 미니멀리즘 시리즈를 계속 써야 되는데, (미니멀함과는 관련이 크게 없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쏟아져 나오네요. 이런! *






아기를 낳고 나서 집에 돌아와 '한동안' 온전히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집에' 있었던 적이 언제였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됐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렇게 출산휴가를 받기 전에는 계속 직장에 출퇴근하고 있었고, 그 전에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그 전에는 또 고등학교에, 중학교에, 초등학교에...



아무튼 집에서 온종일 아기와 함께 지내며, 제목 그대로 '많이 울게 되었다.' 이 말만 들으면 아마도 산후우울증이라고 선뜻 진단을 하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오히려 정 반대였다. 전혀 우울하지 않았으니까, 그 보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행복해서, 그래서 겁이 나서, 눈물이 났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 나는 늘 즐길거리로 가득하던 쇼핑몰에 사는 기분이었다. 사무실에서 일도 하고, 소소하게 쇼핑도 하고, 맛집이라는 곳에서 음식도 이것저것 먹고. 그런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평생을 실내에서 지낸 느낌이랄까. 건물 '안'의 세계는 충분히 즐거웠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 안에서 무엇을 더 열심히 하고 하나라도 더 얻고 경험하면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웬걸, 갓 태어난 아이와 함께 하루를 온전히 지내고, 또 그런 날이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한 달이 지나가다 보니, 내가 살던 세계 - 그 커다랗고 완벽한 건물 - 에서 나가는 문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아기를 품에 안고 문 밖으로 나서니 상상하지 못한 세계가 있다. 햇살이 잔디 위에 부서지고, 은목서 향이 가득하고, 바람이 코 끝을 간질이는. 그 '바깥' 세상은 '안'의 세계보다 더 멋지거나, 혹은 훨씬 고달프다는 식으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황홀함이었다. 내가 알던 세계의 벽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며 광활한 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느껴보지 않고서는 공감할 길이 없을 것만 같다.












나는 (당연하게도) 초보 엄마였고, 아기는 자주 울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산모가 피곤하고 잠이 왜 오지 않았겠냐마는, 나는 그 울음소리가 싫지 않았다. 그 작디작은 신생아가 울 때, 아기를 안고 서서 이리저리 움직이면 눈물이 났다. 이 아기가 내 품 안에서 안정을 찾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내가 누군가에게 정말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말이다. 작고, 예쁘고, 소중하고, 놀라웠다. 이 행복과 충만함이 믿기지 않았는데, 그러다 보면 갑자기 울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이 감정은. 태어나서 느껴 본 것 중 가장 근사했다. 




세상에서 아기 낳아서 키우는 게 제일 재미있어.


재미있다 - 이 말이 내 친구들에겐 정말 의아했나 보다. 그런데 정말이었어. 지금껏 즐거움을 찾기 위해 세계 40개국이 넘는 낯선 곳들로 여행도 다니고, 술과 음식에도 흠뻑 탐닉해 보고, 연애도 아쉬움 없을 만큼 열심히(?) 해 보았는데 - 세상의 가장 지극한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재미있고 짜릿해! 늘 새롭고 경이로운 마음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거였을까.



그 재미의 근원은 내게 불쑥 찾아온 질문들에 실마리가 있는 듯 했다. 아기와의 시간 -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아기와 있는 나 혼자만의 시간 - 을 거치며 근본적인 질문들이 찾아왔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이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조금 더 풀어서 생각해 보자면 '생명이 육체에 깃든 채 흘러가는 시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아기의 삶과 내 삶은 어떻게 관계 지어지는가. 기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규정하는가..., 그런 것들. 살면서 아무도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라면 꼭 한번쯤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데, 다들 겉만 돌았으니까. 그런데 이 작은 생명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그 어느 곳에서의 배움보다 나를 더 강렬하게 자극했다. 삶의 의미가 땅 속 고구마처럼 가만히 묻혀 있다가, 뿌리털 하나하나 전율하는 느낌!











아기를 가만히 바라보면, 이 아기가 품고 있는 생명의 시간이 느껴진다. 서른의 나에게서 태어나, 나보다 30년은 더 살 생명체. 우리 인생을 100cm짜리 줄이라고 할 때, 나와 아기의 삶은 약간 어긋나게 놓인 상황이다. 둘이 겹치는 부분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건 내 윗세대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아랫세대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도식으로 설명이 되겠지?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니 사람들의 일생이란 무한한 우주 속을 떠 다니며 손 끝을 잡고 있는 것 같은 모양에 가까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무한의 세계, 그리고 잠시 동안 삶의 형태로 반짝이는 생명들이 손가락에 손가락을 잡고 있다가, 한 명씩 차례대로 톡- 하고 그 손을 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 그 이미지가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고, 동시에 너무나 아름다웠다. 관계라는 것은 그런 것일 테지. 무한한 세계 속에서 이어진 손가락들. 우주의 광대함에 비하면 너무나 여리지만, 제 풀에는 최선을 다해 단단하게 잡은 사랑의 마음.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삶에 감사하다 보면, 이 세상에 깃들어 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 더 명확해진다. 세상 모든 것에 그렇게 얽매일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죽음에서 삶으로 '놀러 나온 동안' 기분 좋고 행복하게, 함께 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보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 끝에는 목 메이는 슬픔과 두려움이 있다. 사실, 이 생각을 하고 두려움을 많이 느꼈다. 나도 언젠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겠지. 이 아기도 노인이 되었다가 툭 하고 그 손가락을 놓겠지. 그러면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단 한 번뿐이라는 생각이 너무 가슴 저리게 확실하게 다가와서, 그만 또 눈물이 왈칵 나고 만다. 목구멍 뒤쪽에 뻐근하며 아프다. 그렇게 시큰한 코를 훌쩍이며 마른침을 삼킨다.






결국엔 다 사람이 직접 하는 것들만 남는다. 함께 한 대화, 바라보던 눈빛, 토닥이던 손길 같은 것들이 진짜다. 그 틈엔 대단한 물건도, 허례허식도 끼어들 틈이 없다. 광막한 어둠 속에서 진짜는 그 꽉 걸어 잡은 손가락뿐이니까.









* 대만에서 파랗게 흔들거리는 늦여름의 나무를 보며 두 번째 글을 전합니다. 보잘것 없는 끄적거림을 구독하고 읽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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