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기대는 것에는 상처가 없습니다
내가 사는 세계에는 '의존'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다. 의존(依存), 다른 것에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의미며, 남에게 예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의 자립(自立)과 대치된다. 의존적인 사람은 상대와의 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자기 자신을 잃고, 언제나 공허하며, 결코 만족할 수 없다고 진단받는다. 스스로 서는 의지와 자의식의 불충분이 의존을 탄생시켰다는 이유에서다.
맞다. '자기'가 텅 빈 사람을 만나면 이들은 끝내 의존적인 성향을 드러내고야 만다. 상대방이 충분할 만큼 연락하지 못하면 과도하게 불안해하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며 그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때로는 정 반대의 증상이 나타난다. 관계를 믿지 못하기에 상대를 내버려두지 못하고 조종하거나 소유하려고 애쓴다. 이들은 종속적인 동시에 강압적이다. 그래서 그들과 만나면 '피곤하다.' 미안하지만 - 그 과도한 자학이, 확신 없음이, 무의미한 집착이, 관계를 피로하게 한다.
결혼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쁜 것은 없으니 다행이지,
8년인가, 꽤 오랜 기간 연애하다가 얼마 전 결혼한 그녀를 만났다. 어차피 작은 아파트를 얻어 2년째 동거 중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한다고 생활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결혼하고 딱히 새 집으로 이사를 간 것도 아니다.)그런데 결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는 썩 즐거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결혼'의 제도 속으로 들어온 셈이라며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다. "결혼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쁜 것은 없으니 다행이지, "라는 말이 슬펐다. 더 들어 보니 사실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단다. "나 같은 페미니스트가, 사실 '결혼도 안 한 여자'라는 말 듣기가 싫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도 일정 부분 굴복한 거야. 달라진 것은 없지만 왠지 굴레에 갇힌 느낌이라 찝찝해", 라는 말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위안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짐짓 쾌활한 척 농담을 던지는 것도 이상하고.
내 세대의 배운(?) 여자들은 '의존'을 혐오한다. 여자이지만 독립적으로 멋지게 살아보자-는 것이 새마을 운동의 구호처럼 자의식 강한 여자들 사이의 프로파간다였다. 남자에 대한 의존, 가족이나 제도에 대한 의존 모두 척결해야 할 대상인 셈이다. 경제적인, 신체적인, 시간적인 의미에서 자유를 제약받는 것에 대해 '배운 여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도장을 찍는다. 그래서 그냥 '커리어 다 포기하고 경제적으로 걱정 없는 남자를 잡아(?) 결혼해 사모님 라이프를 즐기기로 결심한 여자들'에 대해 경멸을 보내기로 합의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사는 건 또 뭐 어떤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물론 사회적인 맥락을 따질 때 결혼이 자유를 제약한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결혼과 그의 파생상품 -그러니까 육아, 개인적 소비, 여가활동, 시간 분배 등 모든 것들- 이 여자의 자의식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결혼은 독립성을 저해하는가?
왜 굳이 여러 사람 불러놓고 '우리 결혼한다'며 선언을 하고, 구청에 가서 신고를 하고, 골치 아픈 일들을 만드는 걸까. 세상 어느 결정도 온전히 장점만 있거나 단점만 있는 것은 없지만, 여러 가지 (쉽게 떠오르는) 단점을 극복하고 나서도 결혼하기로 결심한 뒤 실행에 옮기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꾸만 그녀와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 사실, 잘난 여자들은 "의존적이라는 누명"이 두려워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 어깨에 푸욱 기대어 쉬는 지극한 기쁨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친구를 사귀는 이유는 무엇인가? 솔직히 전략적인 '인맥' 말고, 정말 친구. 내가 너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친구라고 믿고 힘든 날 연락할 수 있고, 또 네가 그 부름에 손 뻗을 걸 아는 그 따뜻한 느낌을 주는 몇 안 되는 특별한 사람들. 결혼은 그 인생의 벗들 중에서도 더욱 특별한 한 사람과의 우정이며 연합이다. 결혼의 본질은 평생 같이하며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다짐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다짐에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해 공표도 하는 것이고.
친구건 배우자건 관계의 진짜 핵심은 '상호 지지'에 있다. 우리가 분절적으로 완벽히 존재한다면, 친구가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의지할 수 있는 관계야말로 우정의 핵심인데, 우리는 왜 결혼이라는 중대한 관계에서만큼은 의지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나. 평생의 동반자 앞에서 삶의 크고 작은 굴곡을 공유하는 것, 때론 힘들다고 기대어 우는 것, 위안받는 것... 여기에는 상처 받을 두려움이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의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이 된다는 기쁨, 삶의 태풍에 단 하나의 버팀목이 필요할 때 그게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하고, 그때의 마음을 되새기며 어려운 시기를 이겨나가겠다는 다짐. 이런 것들이 결혼의 진짜 이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멋진 여자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과, 배우자에게 삶을 공유하고 기대는 것은 자의식의 소멸과 관계가 없다. 나는 어떤 가치 판단에 대해 쉽사리 해답이 나지 않을 때면, 프레임을 벗어나 보기 위해 노력한다. (1)한국의 (2)가부장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3)관습적인 (4)아내의 역할... 뭐 이런 수식어들은 모두 던져 버리고, 나라는 인간 존재는 왜 저 사람과 '결혼하겠습니다'라는 결심을 하고 이것으로 모자라 온 주변 사람들에게 결혼식을 올려 알렸으며 법적으로 신고까지 하였나 되짚어 보는 것이다. 그 생각 끝에는 뭉클한 따뜻함이 있다. 인생에서 서로 의지하겠다는 결심. 그가 지치면 내가 그를 업고 건널 것이고, 내가 힘들 때 그가 나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
독립적인 여자가 결혼에 대해 흔히 두려움을 가지는 이유가 배우자에게 의지하기 싫어서, 혹은 의지하기 못해서라는 애먼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간섭이 피로하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서로의 삶에 침투해 간섭하겠다는 의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신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도 말이다.
사실, 진짜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립'한다는 것은 혼자가 되어도 삶의 각 부분을 정비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에 있는 것이지, 현재의 관계와 완벽히 분리해 존재하는 스스로가 되는 데 있지 않다. 결혼 전과 후의 관계와 삶이 달라지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결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이유'다.
시간이 가는 동안 우리 모두의 삶은 파도를 넘는다. 몸이 아플 때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한쪽이 더욱(?) 실패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이런 물살 속에서도 결혼이야말로 성숙한 사람들의 상호 보살핌이 될 수 있기를. 기대고 위안받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를, 또 그가 가장 힘든 시기에 내가 상대의 한없는 바다가 되어 품어 줄 수 있기를. 그런 동화 같은 꿈을 꾸는 것이 결혼이기를.
* 세상 모든 관계가 마찬가지겠지요. 삶의 의미는 분리된 '나'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딸로, 당신의 엄마로, 당신의 아내로, 일하는 사업가로, 글 쓰는 순간의 작가로, 빈둥거리는 게으름뱅이로. 나는 모두이고, 모두는 나의 일부입니다. 마음껏 의지하세요.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온전히 나를 열고 기대는 것, 그리고 상대가 기댈 수 있게 자리 펴 주는 것에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