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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un 05. 2023

여름은 수박향으로 옵니다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올봄은 유난히도 춥다가 덥다가 오락가락했던 것 같아요. 봄밤도 즐기지 못했는데 난데없이 여름이 와버린 것 같습니다. 올해는 기상관측 이래 벚꽃이 가장 빨리 피었다고 하던데, 미세먼지 때문에 꽃소식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바람에서는 오래된 솜이불을 털 때 나는 냄새가 났고, 하늘은 한 점의 푸름도 찾을 수 없는 회색 덩어리로 보였으니까요. 황사와 미세먼지로 뒤덮인 봄은 봄이 아니라고 반발하고 싶었습니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라일락도, 당연한 듯 색색의 꽃들이 만개했지만 하늘이 흑백일 때는 제 아무리 꽃이 아름답다 해도 봄이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안도현의 봄밤을, 김수영의 봄밤을 펼쳐 읽고, 아예 몽땅 외웠습니다. 하늘이 흐려 마음이 흐려지려 할 때마다 ‘어느 마당가에 핀 살구꽃을, 살구꽃을’ 생각했습니다.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라도 가슴에 봄을 품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고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게 봄은 환한 봄밤으로 온다면, 여름은 수박 향으로 옵니다. 아침 일찍 문을 나설 때, 수박이 쩍 하고 붉은 속살을 보이며 쪼개질 때 나는 수박향이 코끝을 스치면, 여름이 시작되는 겁니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두름’을 부추기는  봄과 달리 여름은 말없는 아이처럼 수박 향으로 조용히 다가옵니다.


아침 공기에서 수박향이 느껴질 무렵, 나무의 초록은 짙어지고, 열매들은 익어가지요. 그때 가장 먼저 무르익는 것이 오디인 걸까요? 어제저녁 인왕산 오르막길이 떨어진 오디들로 붉게 물든 광경을 보았습니다. 나뭇가지에 달려있는 오디를 하나 따서 입에 넣었더니 그렇게 달수가 없어요. 아예 기다란 가지를 끌어당겨서 거기 달린 오디를 전부 따먹었습니다. 열 개쯤 먹고 나니 여름을 먹은 듯 기운이 났습니다. 오디가 으깨지지 않게 조심히 따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손가락 끝이 보라색으로 물들고, 보나 마나 입술과 혀 끝도 보라색이 되었을 겁니다. 등산길에 나처럼 오디를 따 먹는 사람 한둘쯤은 있겠지만, 대부분을 바닥으로 떨어져 으깨질 테지요. 달콤 새콤한 여름의 맛이 길거리에 떨어져 밟히겠지요.


나무처럼 두 팔을 벌리고 숲의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울창한 초록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햇살이 비단실로 내리는 비 같았습니다.


거북목 때문에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아야 합니다. 견갑골을 붙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사이 손상된 디스크가 치유될 수 있다고, 유명한 의사 선생님이 자신의 유튜브에 나와서 말하는 것을 보았거든요. 그때부터 나는 자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답니다.


의사 선생님은 거북목은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살아온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물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는 의미일 텐데 어쩐지 비굴하게 살아온 증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등산할 때도 하늘 보다 자주 땅바닥을 내려다본 것 같습니다. 나무뿌리를 밟고 넘어질까 걱정되니까요. 나무뿌리를 보지 말고 하늘로 뻗은 나무들을 보고, 이파리 사이에 틈을 타서 쏟아지는 여름 햇살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수박향 내뿜는 여름나무의 우듬지를 향해 몸을 활짝 펴고 살아야겠어요. 여름은 거북목을 치료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인 것 같아요. 올려다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 계절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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