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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Feb 09. 2024

정화의 풍경

낮 동안 햇살이 좋아 어느새 봄인가 하는 마음이었는데, 퇴근길에 바람이 심하게 불면서 눈발이 날렸다. 퇴근길에 내리는 눈을 반기는 이 드물고, 쓸모없이, 검은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다가 웅크린 검은 패딩 위로 떨어져 사라졌다.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눈일 텐데, 잠시 생각하다가, 서둘러 집에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새소리가 유난하여 베란다로 나가보니, 세상에나, 쓸모없던 그 눈발이 놀라운 아침 풍경을 만들어 놓았다. 겨울 나뭇가지마다, 자동차 지붕 위에, 놀이터의 빨강파랑노랑 색 미끄럼틀과 그네 위로, 시선 닿는 모든 곳이 하얀 세상. 목련 꽃그늘 아래 서 있는 듯 환해진 세상. 아이처럼 우와, 소리 지르며 마음이 삽시간에 명랑해졌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남산 길 산책을 했는데, 소나무 위에 쌓였던 눈꽃이 낯 햇살에 녹으며 머리 위로 툭툭 떨어졌다. 눈꽃 구경 나온 산책자들의 정수리 위로 툭, 빨개 진 볼에 툭, 그때마다 아, 차가워하는 즐거운 비명.


소나무는 의젓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장난꾸러기였던 건가. 낙엽 떨군 나무들을 조용한데, 소나무만 눈뭉치를 흔들며 지나가는 산책자에게 장난을 친다.겨우내 푸른 기운을 어디에다 쓰나 궁리를 했나 보았다. 남산에는 워낙 소나무가 많아서 산책하는 동안 툭, 툭, 툭 떨어지는 눈세례를 피하기 어렵다.


눈 세례에 머리카락은 우스운 꼴이 되겠으나, 정수리로 떨어진 눈뭉치가 녹아 이마를 적실 때, 어쩐지 마음이 정결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헤어스타일 따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새들도 강아지처럼 흰 눈을 좋아하는 건지, 새소리 한껏 명랑했고, 눈꽃 녹아 떨어지는 투두둑 소리가 새의 날갯짓 소리 같기도 하고, 푸른 소나무 아래서 이마를 적시며 아이 마음이 되는 사람들, 겨울의 마지막 눈이 만든 정화(淨化)의 풍경이었다.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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