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올해 94세시고 아주 정정하시고 부지런하시다.
아직도 매년 거의 혼자서 파, 고추, 마늘, 깨 등의 농사를 하시고 수확한 걸 자식들에게 나눠주신다.
또 총명하시다. 치매 예방용으로 지자체에서 준 퍼즐도 그림을 외워서 맞추신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우리 할머니 글만 읽을 줄 알았으면 서울대 가셨겠다고 했다.
전역 후에 우연히 성인 문해교육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로 할머니께 글을 가르쳐 드리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글을 익힐 때까지 내가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가슴 한편에 아쉬움이 남아서 종종 그때 일이 생각났지만
이제는 정말로 글을 배우기엔 너무 늦은 나이시지 않냐며 애써 외면했다.
그러다가 여느 때처럼 할머니랑 대화를 하는데 할머니 어린 시절 얘기가 나왔고
할머니께서 여자라는 이유로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인데 불과 두 세대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는 이름만이라도 써보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할머니가 퍼즐의 그림을 외워서 맞추시는 모습을 보니 이름만이라도 써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고, 아직도 이렇게 똑똑하신데 이름은 쓰게 해 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을 그림처럼 기억하고 쓰실 수 있게 하면 되겠다.'
처음에는 시중에 있는 한글 교재에서 할머니 이름에 해당하는 한 자 한 자를 잘라서 책처럼 만들까도 했지만 너무 비효율적이고 눈이 안 좋으신 할머니가 쓰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포기했다. 계속 고민하다가 할머니 댁에 있는 달력이 문득 떠올랐고 그 달력에 숫자가 아닌 할머니 이름을 넣어서 쓰게 해 드리면 할머니도 쓰기 편하시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미리캔버스에 시골 달력과 비슷한 모양의 템플릿이 있었고 내가 원하는 형태로 할머니 이름 쓰기 달력을 만들 수 있었다. (미리캔버스! 정말 고마워요!!)
달력을 선물드린 후 두 달이 조금 안 돼 설이 돼서 할머니댁에 갔다.
할머니께 이름 써보셨냐고 여쭤봤더니 주민센터에 갔는데 직원이 서명하라고 해서
이름 쓴 후 잘 썼냐고 물어봤더니 잘 쓰셨다고 했다고 자랑하셨다.
너무 뿌듯하고 기뻤다. 아마 내가 그동안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준심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