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생각이 사라졌다.
최근 연휴를 맞이해서 할 일을 못 끝낸 사람들이 할 일을 끝내기 위해 모인 모임에 참여했다. 각자 자신들의 할 일을 가져오거나 읽고 싶은 책을 가져오거나 하는 식이었다. 연휴의 마지막날 아침이었으므로 각자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각자 업무를 하다가 쉬는 시간에 나온 이야기였다.
‘경제적 자유를 이루신’ 어떤 분이 이끄는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는데 좋더라는, ‘50억 이상을 축적하신 분’이 하는 모임도 있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며 모두의 관심을 동하게 했다.
사람들의 대화를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런 대화를 듣다가 깊은 사념에 빠지게 됐다.
최근 몇 년 동안 ’갓생‘이라는 키워드가 인기를 누렸다. 미라클 모닝, 투자 강의, 부동산 모임, 헬스 더 나아가서는 찬물샤워 등도 갓생의 하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갓이라는 접두사는 아마 ’신‘이라고 하는 단어가 가지는 극단적인 긍정적 의미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고 생은 삶의 한자어를 말한 것이다.
90년대 생은 어렸을 때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너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는 질문이다. 그럼 초등학생 때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이다.
무엇이 아닌 어떤을 묻는 질문이었고 그에 맞게 대답한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 듯이 질문도 답변도 바뀌게 되었다. 30대를 맞이하며 ‘훌륭한 ‘이라는 형용사 따위는 저버리고 경제적 자유, ~차를 끄는 삶, ~평을 가진 사람 등으로 답변이 바뀌었다. 돌려 말할 것도 없이 정답은 ‘돈’인 것이다. ‘훌륭한’이라는 우리들의 방대한 목표가 ‘돈’이라는 거대한(?) 목표로 바뀌었다.
나이를 먹으며 우리는 숫자에 민감해진다. 키, 만 나이, 몸무게, 혈당 그리고 차 값과 돈까지. 수에 밝아졌다고 해야 할지 집착한다고 해야 할지 표현하기 나름이지만 어린 시절과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고 그 나이에 맞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피터팬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아주 한심해 보이는 시대이기에 적절히 수에 밝은 현실적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가 학업을 하는 12년 동안 문학에 대해 배웠다. 고전 문학을 통해 충, 효 사상을 배웠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다. 현대 문학을 통해 인간 소외에 대해 배웠고 빈민층 삶의 애환을 배웠다. 전쟁의 참혹함과 처절한 사랑도 배웠다. 우리의 삶과 가장 맞닿아 있는 것들을 12년 동안 다양하게 배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꿈에 이것들은 없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배운 노동자의 애환에 공감하는 삶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관동별곡’에서 배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겠다는 애민의 마음도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염상섭의 ‘삼대’를 통해 배우는 올바른 가정이 무엇인가는 우리의 고민이 아니고 ‘부의 추월차선’에 어떻게 올라탈 것인가만이 우리의 고민이다.
열정 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질 힘도 없다. 열정적으로 흔히 ‘갓생’을 살려는 사람들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갓’의 긍정적 의미뿐 아니라 창조주라는 의미도 관심을 가진다면, 신의 섭정을 우리가 이 땅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진정한 ‘갓생’ 일 것이다. 아침에 이불을 개는 갓생에서 조금 더 나아가 이불을 덮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불을 나눠주는 삶까지 이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갓생이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 이런 반응이 돌아온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솔직히 말하면 일단 돈이 중요한 가치이지.’
부정하지 않는다. 돈을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이며 돈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이성적인 것이고 돈의 흐름에 올라타는 데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그렇기에 더 무섭다. 물질주의는 ‘이성적‘이라는 말과 함께 온다. 환경과 관심은 ’ 감성적‘이라는 말과 함께 온다. 어떻게 저렇게 이분법적이 되는지 납득이 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해가 그렇기에 더 무섭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이다.
돈만 쫓지 말라는 사람은 ‘그러니 네가 지금 모습이다.’ 혹은 ‘그렇게 자기 위안하는 거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감성적으로 살아가니 돈을 벌지 못하고 자기 위안이나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를 직접 면전에다 하는 경우는 과거엔 보지 못했지만 이제 sns로 인해 이런 글이 달린 댓글을 수도 없이 보게 된다.
우리의 서점엔, 도서관엔, 책장엔 항상 문학이 꽂혀있다. 많은 수의 문학은 아픈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에 공감을 유도한다. 문학이 사라진 시대. 공감과 감성 따위는 사라지고 이성과 숫자만 남아있는 시대는 ‘갓생’이 의미가 있을까? 문학은 읽지 않더라도 문학적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다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