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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May 31. 2019

쾌락해도 괜찮아

새털처럼 가벼워 질테니


다큐멘터리 <엔딩노트>의 주인공 스나다 도모아키는 40년간 샐러리맨으로 일하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위암 5기 판정을 받는다. 죽음을 앞둔 그는 담담하게 To-Do list를 만들어 평생 안 해본 일들을 시도한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한번 믿어보기, 평생 찍어주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등. 지금까지 나는 ‘살면서 한 번쯤은’ 하는 태도로 용감하게 부딪혀 왔는데, 요새는 어쩐 일인지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튀어 오르지 않는다. 이게 바로 권.태.라는 건가? 흐으으으음......
오오, 생각났어. 하고 싶은 게 아직 있었네! 


우선, <알쓸신잡 3> 멤버들과 같이 여행을 하고 싶다. 멀리 파르테논 신전이 보이는 아테네의 한 식당에서 와인을 마시며 토론이 이어지던 그 밤에, 나도 그곳에 함께이고 싶었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속에서 역사와 건축, 도시와 문학, 미시세계의 물리학인 양자역학까지 왕수다가 짜릿짜릿하다. 잡학박사 유시민, 도시박사 김진애, 언어수집가 김영하, 물리학 박사 김상욱의 조합은 지식과 교양의 잔칫상을 떡 벌어지게 차려냈다. 


(c) wallpaper abyss


<알쓸신잡 4 코카서스>편을 기획해볼까? 카스피해와 흑해 연안의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3개국을 돌며 샤슬릭을 굽고 그루지아 와인을 홀짝이며 아라랏 산에서 ‘노아의 방주’를 역사적, 과학적으로 논하고 싶다. 에스더 왕비가 살았던 페르시아 제국에서부터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에 이르기까지 강대국 역사에 둘러싸여 온갖 수난을 겪은 코카서스 지방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유시민, 김영하 작가의 찰진 토크로 함께 하면 재미있겠다. 


인도 여행도 좋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와 ‘분홍 도시’ 자이푸르를 거쳐 남부의 케랄라까지 가 보는 거다. 내가 사랑하는 파니르 커리와 갈릭 난, 사모사와 플레인 라씨를 배터지게 먹고 볼리우드 ‘마살라 영화’에 눈 뜨게 해 준 국민 배우 샤룩 칸<데브다스(2002)>를 보며 집단 군무도 추고 싶다. 볼리우드 영화가 탄생한 사회적 배경과 문화적 특성에 대한 토크도 빠질 수 없겠지? 캘커타에 처음 갔을 때 찬드니촉 시장에서 발견한 ‘This is India’의 오묘한 매력을 고수 이야기꾼들과 수다 떨며 ‘스토리의 향연’에 취하고 싶다. 


(c) bkhomeworkbzfb.leonardo-puzzles.com





알쓸신잡 여행 후에는 분위기를 확 바꿔볼 테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는 허위의 옷을 벗어던지고 ‘욕망해도 괜찮아’ 모드로 마음껏 쾌락을 누려보자. 너무 과해서 토할 만큼 화려하고 럭셔리하게! 먼저, 뉴욕으로 날아가는거다. 하루 투숙비가 $6,000이라는 페닌슐라 뉴욕 호텔의 Deluxe Suite에 체크인을 하고 저녁은 뉴욕 스테이크 전문점 스미스&월렌스키(Smith&Wollensky)에서 먹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등장한 그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디너 후에는 리무진을 타고 뉴욕 패션위크에 가서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패션쇼를 안구돌출할 만큼 봐 주리라. 


(c) VINGT Paris


다음 날 아침은 룸서비스로 느긋하게 에그 베네딕트를 먹으며 맨해튼 시내를 내려다보리라. 코즈모폴리턴 시티 심장부에서 인간의 욕망이 쌓아 올린 마천루와 개미처럼 꿈틀거리는 사람들을 천천히 바라보리라.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침을 먹고 나면 명품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Bergdorf Goodman)에 가서 욕망의 바다에 빠질 테다. 결혼한 뒤로는 백화점에서 쇼핑 한 기억이 별로 없다. 명품에 별 신경을 안 쓰고 살았는데, 떠나기 전에 한 번쯤 마음껏 질러보고 싶다. 영화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처럼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샤넬, 까르띠에, 루이뷔통 매장을 휘젓고 다니며 소비의 쾌락을 만끽하리라. 저녁에는 <귀여운 여인>의 오페라 장면을 재연해 볼까? 리처드 기어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오페라를 보러 가는 바로 그 장면. 30년 전 로망이었던 그의 팔짱을 끼고 <나비부인>을 보고 싶다. 죽기 전 소원이라면 남편이 눈감아주겠지? 오페라에는 영 관심없는 사람이니 어쩌겠나, 큭큭. 


(c)  Jessica Jordan Events





이제 집으로 돌아와 차분하게 마무리를 해야겠다. 생전 장례식을 준비해야지. 이름만 ‘장례식’이지 사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신나게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파티를 할 거다. 함께 해서 좋았다고, 고마웠다고, 미안했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얘기할 거다. 한 치 미련도 남기지 않고 죄다 털고 가련다. 생전 장례식 초대에 앞서, 먼저 용서해 줘야 할 사람도 떠오른다. 지금은 용서하기 어렵지만 떠나기 전에는 용서해야지. 나 또한 용서를 구해야겠지. ‘그땐 그랬지만, 이제는 다 괜찮다’고 탈탈 털고 한번 안아주리라.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나면 새털처럼 가벼워지겠지. 뒷일은 걱정 없다. 예쁘게 장례 치러주겠다 약속한 남편이 있으니, 편안하게 날아오르리라. 




(C) Jonny Linder




Front image (c) by  Анастасия Гепп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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