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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Jun 07. 2019

박경리 선생님께

- 원고지 4만 장만큼의 기억

2년 전에 통영에 처음 가봤어요. 선생님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곳인데 오십 년 만에 처음 갔어요. 딸내미가 원하는 루지를 타고, 술 좋아하는 남편하고 다찌집과 횟집에서 한 잔 하고, 배 타고 한산도에 반나절 다녀오니 2박 3일이 훌쩍 지나가더라고요. 제가 가고 싶었던 <박경리 기념관>에는 들르지 못했어요. 남편도 딸도 호응을 안 해 줬죠. 기념관에 가면 천천히 ‘토지’ 초본도 둘러보고 선생님 삶의 흔적과 향기를 맡아보고 싶기에 나중에 혼자 가려고 남겨뒀지요. 가끔 남편과 싸우고 어디론가 훌쩍 가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때 ’ 나 홀로 여행‘ 찬스 한 번 쓰려고요. 밤늦게 출발하면 4시간이 채 안 걸리니 혼자 운전할 만하겠죠?


통영에서 구시가지에 있는 충무비치호텔에 묵었어요. 30년 전에는 도심의 랜드 마크였을 법한 그곳은 오늘날 모텔 수준인데,  뜨끈한 방에 이불 깔고 남편과 딸은 낄낄거리며 <개그콘서트>를 재밌게 보았지요. 깔끔한 숙소에서 여행의 기분에 젖고 싶었던 저는 윤이상 음악당 옆에 있는 현대식 리조트를 바라보며 심난하고, <박경리 기념관>에  못 가서 아쉽고... 내내 마음이 울적했어요. 돌이켜보니 호텔이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삶의 허무함과 무상함에 대한 회색빛 감정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나 봐요.              


통영에 가기 전에 <어린이 토지>를 읽었어요. 그 전에는 왜 이 유명한 소설을 한 번도 펼쳐볼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친구 문선이는 <토지>를 읽고 선생님 집에 가서 한 달쯤 밥을 지어드리고 싶다 했어요. 대학 동창 소영이는 30년 전에 <토지>에 빠져서 등장인물 연구를 하고 싶어 했지요. 저는 총 5부 26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에 시작할 엄두를 못 냈던 것 같아요. 장대한 대하소설을 소화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죠. 그만큼 옆을 돌아보지 않고 숨 가쁘게 달려왔나 봐요. ‘자기실현’과 ‘목표 달성’이라는 큰 그림과 성공지향적 세계관 안에서 청교도적인 근면성으로 힘차게 달려왔죠. 인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줄 알았어요.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바보같이... 간간이 숨을 고르며 주변을 돌아보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관조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았을 것을.             




살면서 <토지>는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은데, 긴 소설을 읽을 자신은 없고 해서 <어린이 토지>를 집어 들었죠. 처음에 두 권만 사서 읽었는데 서희, 봉순이, 별당 아씨와 환이 등 이야기에 빠져들어 전권을 바로 들였답니다. 이 소설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여덟 살 딸내미에게 간간히 이야기를 해 줬어요. 이 아이가 한국 근대사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곧 읽게 되기를 바라며... 지금은 원작 <토지> 2부 1권을 읽고 있어요. 서희가 상현에게 의남매를 맺자며 '길상이하고 결혼하겠다'는 말을 한 직후에 상현이 서희 얼굴에 술을 붓고 떠나버린 그 장면을 넘어갔네요. <토지>를 읽으며 여러 번 울었어요. 함안댁이 나무에 목을 매달고 한겨울 땡땡 얼은 땅에 거복이, 한복이가 엄마의 시신을 묻는 장면이 참 춥더라고요. 한복이의 슬픔에 내 감정을 대입해서 같이 울었어요.


다섯 살에 엄마가 떠나버린 서희도, 무당의 딸이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지 못한 월선이도 아프잖아요. 나이 오십에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망가진 건지 건지 질문이 많았거든요. 대상포진에 걸리고, 가출을 하고, 직장에서 보직 해임되고, 가족 간에 왕래가 끊기고... 내가 제일 아프고 가엾은 것처럼 느껴졌던 ‘홀로 어리석은 시간'에 선생님이 토지 속에 그려낸 인생과 그네들의 삶이 묵직하게 제 마음을 만지며 속삭였어요. 삶이 원래 그런 거라고. 누구나 아픈 거라고.      




(c) 동아일보




김훈 작가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맨 뒷 장에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라는 글이 실려 있어요. 선생님의 사위인 김지하 시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형 집행정지로 영등포교도소에서 풀려나던 그 날 이요. 당시 기자였던 김훈 작가가 취재 차 형무소 앞을 지키고 있다가 선생님을 마주친 기억에 대해 썼어요.


“아마도 오후 5시 30분쯤이 아니었을까.
내가 짬뽕 그릇에 입을 대고 국물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쳐드는 순간, 교도소 정문 맞은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웬 허름한 여인네가 포대기로 아기를 업은 채,
추위 속에서 웅크리고, 저물어가는 교도소 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엄동설한에 교도소 앞 언덕에서 태어난 지 10개월쯤 된 외손주 ‘강’ 이를 엎고 칭얼대던 아기를 어르고 있던 현장이었죠. 그날 김훈 기자는 김지하가 출감하던 순간을 기사로 엮어 송고했지만 박경리 선생님 얘기는 한 줄도 쓰지 않았대요. 쓸 수가 없었대요.


“ 새벽 2시께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저도 같이 울었어요. 아기의 엄마는 그때 왜 오지 않았을까? 추위에 어린 손주를 등에 업고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사위를 기다리는 선생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선생님의 외동딸인 김영주 관장님을 몇 번 뵈었어요. 문화 행사를 기획하며 몇 차례 관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저를 귀엽게 봐주시고 친근하게 대해주셨어요. 대화중에 당신 아들 얘기를 꺼낸 적이 있는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 아들에 대한 엄마의 걱정이 묻어났지요. ‘연세에 비해 아직 아들이 어리구나...’하며 저 또한 늦게 출산한 엄마로서 그 마음이 전해졌어요. 김훈의 산문을 읽으며 선생님이 업고 있던 '그 아기'가 ‘그 청년’과 연결되면서 찌릿한 파장이 가슴에서부터 팔다리까지 퍼져나갔어요.


선생님이 결혼하고 5년 만에 남편이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고, 딸 영주를 홀로 키우며 글을 쓰던 시간. 금쪽같은 외동딸 영주가 혁명을 꿈꾸던 시인 김지하와 불현듯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고. 1975년 한 겨울밤, 아기 엄마는 어디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채  외손주를 업고 형무소 앞에서 사위를 기다리던 그때 선생님의 모습과 마음을 그려 봅니다.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이 장면 외에 선생님 앨범에는 토지의 원고지 4만 장만큼의 기억이 쌓여있겠죠.  



박경리 선생과 김영주 토지문화관장 (c) 노컷뉴스






<토지 문화관>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아직 실행을 못 했어요. 가족들과 춘천에 자주 가기에 남편에게 원주에 한번 들르자 해도 자기 관심사가 아니라며 혼자 가라네요. 대체로 마음이 따듯한 남자인데 이럴 때 보면 참 무심해요. 한 번쯤 호응을 해 주면 좋으련만... <토지 문화관>서 김영주 관장님하고 차 한잔 마시고 싶어요. 선생님 살아계실 때 모녀간 애증 관계를 슬쩍 캐보고도 싶고, 선생님 떠나신 지 11년이 지났는데 관장님의 현재 삶은 어떤지 여쭤보고 싶어요. 수많은 인생들의 땀과 한숨, 웃음과 눈물을 담은 <토지>와 선생님을 추억하고 싶어요.    



토지문화관 장독대 앞에서 박경리와 예술가들 (c) 동아일보








Front image : 소매물도에서 바라본 등대섬 (c)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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