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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Sep 30. 2019

내 인생의 클래식

이리 와서 같이 춤추자


#스물셋. 모차르트를 만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재수를 했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때라 시사용어사전과 토플 문제집 따위를 한 보따리 들고, 내가 다니던 교회의  작은 교육관으로 출근을 했다. 재래식 부엌에 방이 두 개 딸린 낡은 목사 관저인데 평일에는 비어 있어 공부하기에 조용한 장소였다.


책 보따리와 함께 청록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클래식 명곡 카세트테이프 100개가 007 가방에 빼곡히 들어있었다. 이 클래식 테이프 전집은 1990년대 초반에 유행 상품으로 가격도 제법 나갔던 것 같다. 백수가 무슨 배짱으로 값비싼 물건을 들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내내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다. 막막하고 불안하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그때 모차르트를 만났다. 교향곡 40번과 41번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은 사단조로 모차르트가 슬펐던 시절에 작곡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곡으로, 당시 울적한

내 마음을 어루만졌다. 한편, 교향곡 41번 ‘주피터’는 설명하기 어려운 삶의 환희를 불러일으켰다. 비록 앞날은 불확실하고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지만,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PD가 되고 싶은 내 꿈을 향한 열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 랑랑과 베토벤을 춤추다    


‘한 도시의 문화 수준은 그 도시의 오케스트라 수준과 비례한다’는 글을 읽고 2013년 서울시향 연간 회원에 처음 가입했다. 베를린 필 같은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에만 관심 있었는데, 서울시 오케스트라를 응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회비 5만 원을 냈다. 1월 18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정명훈이 지휘하고 김선욱이 협연한 서울시향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베토벤 교향곡 5번의 감동이란! 오랜  연인 같은 모차르트를 떠나 새 연인을 발견한 설렘이랄까?


연주회 다음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성악을 전공하고 클래식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후배 PD와 돈코츠 라멘을 먹으며 간밤의 연주 얘기를 나눴다. 음악적 감성이 통해 찹쌀떡처럼 찰진 대화가 맛있었다. 서울시향과 정명훈, 김선욱과 베토벤의 감동은 피로한 일상에 종합 비타민 같았다.  일주일 치 분량쯤.   


그날의 감동을 간직하고 싶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CD를 찾다가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 랑랑을 만났다. 랑랑의 베토벤을 듣고 듣고 또 들었다. 폭발하듯이 건반 위를 춤추는 랑랑의 연주가 마음 곳곳에 숨어있는 케케묵은 응어리들을 탈탈 날려주는 것처럼 시원했다.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했던 시기에 베토벤은 사방을 뒤덮은 전쟁의 참화와 진군의 북소리로 인해 미칠 지경이었다. 후원자가 모두 떠나는 바람에 생계를 잇기도 어려웠다. 이 와중에 작곡된 것으로 알려진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는 강력하고 과감하다. 랑랑은 화려한 테크닉으로 청각을 잃어가던 위대한 음악가의 고뇌를 연주했다. 베토벤과 랑랑이 함께 춤추며 듣는 이에게 '이리 와서 같이 춤추자'라고 초대하는 것 같았다.



Image from Pixabay




# 유럽 클래식 여행을 꿈꾸다

     

요즘 비틀즈의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바이올린 연주로 듣는다. 바이올린을 배운 지 이제 7개월 된 딸내미가 매일 연습을 하는 덕분이다. 대학원에 다닐 때 전공과 무관한 바이올린을 1년간 청강했다. 헝가리 유학생 엘레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 레슨을 받았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멍해질 때면 음대 연습실로 건너가 ‘반짝반짝 작은 별’을 연습했다. 끼잉 끼잉 바이올린을 켜다가 피아노도 두들기다 보면 머리가 맑아졌다.


악기 배우는 데 전혀 관심이 없던 딸내미가 <너클리 :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클래식 이야기>라는 청소년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보고 나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개인 레슨을 붙였다. 유튜브에서 <영재발굴단>에 출연한 바이올린 신동 설요은의 영상과 사라 장이 12세 때 연주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영상을 찾아 슬쩍 틀어놓았다. 우리 딸이 BTS 음악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도 함께 즐기면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해 전 정신과 의사 박종호가 쓴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2, 3>을 연달아 읽으며 그가 추천한 CD를 골라 음악을 들었다. 이때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를 비로소 만났다. 음악을 듣다 보니 유럽의 클래식 축제가 궁금해져 김성현 기자가 쓴 <365일 유럽 클래식 기행>을 찾아 읽었다. 가을 시즌에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에서 시작해 여름 축제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까지 유럽 곳곳에서 벌어지는 음악 축제 이야기를 읽고 버킷 리스트가 한 줄 늘어났다. #유럽 클래식 여행.


그때 계획은 ‘딸내미 10세 때 가족과 함께 유럽 클래식 여행’이었는데 현실이 어찌 그리 만만하던가. 버킷 리스트에 뽀얀 먼지가 쌓인 채 딸내미의 아마추어 연주회를 준비하는 소소한 즐거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 아이 대학 보내고 나면 그때는 갈 수 있으려나? 지금부터 적금이라도 하나 들어 놓을까?


유럽 클래식 여행을 가족과 함께 못 간다 한들 큰 아쉬움은 없으리라. 그저, 내 젊은 날부터 함께 해준 모차르트와 베토벤, 브람스와 브루크너가 산책했던  길을 걸어보고 싶다. 그들이 연주했던 공간에서 내 영혼을 어루만진 음악들 들을 수 있다면 황홀하겠지만...  


유럽이 아니면 어떠랴. 어느 도시, 어떤 공연장에서건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과 한데 어우러져 함께 듣고, 느끼고 춤출 수 있다면 소소하고 단단한 행복이 아니겠나.


오늘은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오페테라 <박쥐> 서곡으로 시작해 본다.



Imag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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