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3, 2023
'아카이브 archive'라는 단어가 항상 머릿속에 있습니다.
20여 년 전, 처음으로 옷과 패션 fashion이란 걸 (그 어린 마음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한 이래, '사적인 취향으로 정리한 기록을 꾸준히 쌓아서 보여주는 방식'을 항상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눈으로 직접 본 걸 기록으로 남기자는 마음으로 거리 패션 사진을 찍었고, 글을 썼고, 그다음 일과 100% 연결되지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남았습니다.
처음 혜인서 HYEIN SEO의 서혜인 Seo Hyein과 이진호 Lee Jino를 알게 된 건 오래전이었어요. 둘은 패션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는데, 제 첫 직장이던 어느 편집매장의 일요일 벼룩시장에 참여했어요. 그때 주말의 도산사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인적이 드물었어요. 아마도 비가 조금 내렸고, <데이즈드 DAZED>를 만든 제퍼슨 헥 Jefferson Hack이 방문한 날이라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처럼 옷을 짓고 브랜드를 설립하기 훨씬 전이었지만, 그림을 그려 작은 진 zine을 출판하고 룸 스프레이처럼 쓰는 향을 만들었다는 게 대체로 중고 의류가 가득했던 벼룩시장 분위기와 달라서 신선했습니다. 그때 서혜인이 그린 그림은 아직도 제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이후 (HYEIN SEO의 모든 팬과 친구들이 아는 것처럼) 리아나 Rihanna가 그의 졸업 컬렉션이자 VFILES 런웨이 무대에 선 옷을 입고 뉴욕패션위크에 참석했을 때, 저는 <스펙트럼 spectrum>이라는 계간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발견하고, 인터뷰하고 싶다고 연락했어요. 이탈리아 <보그 VOGUE Italia>부터 <032C>까지 모두가 그들에게 눈길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회신이 왔어요. 이후 채팅으로 안트워프에 있던 서혜인과 대화하다가, 그때 그 학생이란 걸 알게 되었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모두가 20대이던 시절, 작은 전시에 같이 참여했거든요. 신기하고 좁은 세상이죠.
처음 HYEIN SEO에 관한 글을 쓴 게 2014년 봄이었고, 우리는 빠르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강렬하고, 자기 주도적이며, 섬세한 디테일을 지닌 여성복은 고급 기성복과 스트리트웨어와 요즘 테크웨어라고도 부르는 무언가의 사이에서 빠르게 진화했습니다. 적은 구성원이 제법 규모를 지니게 되고, 안트워프에서 서울로 거점을 옮기고, 탁 트인 창과 스테인리스 스틸 책장이 있는 스튜디오에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이 2022년 여름과 가을 사이였어요.
그때 준비하고 있다는 매장 이야기를 들었고, 텅 비었던 1층은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훌륭하게 변해 있을 겁니다. 매장을 연다면서 초대장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두툼한 소포를 열어보니 2013년부터 2022년까지 브랜드의 두 설립자가 찍은 흑백 사진들이 가득한 한 권의 책이 초대장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패션'이란 것이 시대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기록한 순간이 어느 순간 과거의 장면으로 남아 있다고 해도, 이 아카이브를 한 장씩 펼치면서 — 친구이자 지지자로서 — 참여했던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 모두의 기록이 모여 있다는 데 괜스레 자부심을 느꼈어요. 이런 패션 브랜드가 한국에 있다, 하고 말이죠.
10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삶, 생각, 모두가 패션이라고 부르는 그 안에도 정말로 많은 것이 생기고 또 사라졌어요. 그리고 어떤 컬렉션과 브랜드가 보여준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학교를 뛰쳐나온 (사실 졸업한) 학생들은 이제 공고한 팬덤을 지닌 패션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생명이 없는 브랜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익숙하고도 새로운 모습으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친구이자 관찰자이자 또한 지지자로서, 기쁘게 HYEIN SEO의 지금과 과거 그리고 미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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