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아픔이 남아있는
다랑쉬 오름은 내가 제주에 내려와 오름 오르기를 시작하며 아껴두었던 오름이다. 2년 전부터 제주의 10여 개 오름을 오르며 이곳을 다녀와야 할 텐데 하면서도 그리 쉬이 가보지 못했던 건 근처에 다랑쉬 굴이 있어서다.
다랑쉬 굴!
제주 4.3의 아픔이 남아있는 조그마한 굴, 그 굴은 김녕리 사람들이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40여 년 동안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던 그 굴이 있었기에 나는 제주 4.3을 조금 더 공부하고 가 보자 여태 미루어왔는데 10월의 어느 월요일 오후 어떤 연유에 의해 나는 그곳을 가보자 하고 집을 나섰다.
핸드폰 네비의 힘을 빌려 찾아가는 다랑쉬 오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산 6번지, 이곳을 찾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다. 2017년부터 이곳은 동부지역 오름을 순환하는 관광버스가 운영되고 있다.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거문오름을 비롯하여 비자림, 동백동산, 용눈이오름, 그리고 이곳 다랑쉬 오름을 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어 처음 동부지역을 둘러보려는 낯선 이들도 쉽게 접근할 수가 있다.
제주시에서 한 시간 여 달려 눈 앞에 펼쳐진 다랑쉬 오름의 장대한 모습을 보고 나는 차를 세워 그 모습을 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발 382m에 위치한 오름은 비고 227m의 높이를 하고 있다. 참고로 비고란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227m의 높이를 하고 있다 라는 뜻으로 여태 다녔던 오름들 중 아마도 제일 높은 오름이 아닐까? 여겨진다.
일주일 뒤 내가 이 오름을 다시 찾아 해설사 문재진 님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주의 동부지역에서 제일 높은 오름이 다랑쉬 오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월요일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지만 주차장에는 탐방객들이 타고 온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내가 3년 전 귀향했을 때 고향의 친구들 모임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오름 탐방을 하는 동문회가 각 학교별로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초등 동문회,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친구들이 오래전부터 오름 오르기를 한다며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에게 수 차례 참여를 종용했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외지인들도 알았는지 일요일에는 이곳 다랑쉬오름에 오르는 탐방객이 1,000명을 넘는다는 문재진 해설사의 말을 듣고 이제 제주관광의 형태가 많이 바뀌어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수 십 년 전 제주관광은 유명 관광지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형버스를 타고 와 먼발치에서 풍광이 아름답다는 탄성과 함께 기념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대신하여 이제는 다 봤다는 식으로 다시 버스에 올라 돌아섰는데 이제는 체험하는 관광으로 바뀌어감을 알 수가 있다. 작은 웨이스트 백 허리에 차고 삼다수 물병 하나 들고 오름을 오르는 사람들, 도로용 자전거 뒤에 케리어 하나 달고 올레길을 돌아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제 제주는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관광으로 바뀌어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상을 향해 놓인 데크계단을 바라보며 언제 이 계단을 오르나 푸념을 터뜨리며 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3년 전 초봄, 나는 매해 입춘 때면 들불 축제가 열리는 새별 오름을 오른 적이 있다. 그때에 오른 새별 오름은 입가에 단내가 날 정도로 헉헉거린 오름 길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다랑쉬 오름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 하는 자위 감을 애써 가져 본다. 앞선 두 부부가 늦게 출발한 나에게 앞자리를 내줄 것 같이 나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가빠 오르는 숨을 내 쉴 겸 가던 길 멈춰 주위를 둘러보니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와 있는 성산일출봉과 10여 km 떨어져 있는 우도가 내려다 보인다. 송글이 맺혀있는 이마의 땀방울을 스치는 바람이 스쳐 지나가니 덥혀있던 육신이 선듯함을 느끼게 한다.
그 누가 말했던가?
오래전 제주와 서울이 멀게만 느껴지던 시절, 서울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한라산에서 볼 차면 바다에 떨어지지 않느냐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던지던 친구 놈들이 떠 오른다.
이놈들아! 제주는 넓고 볼 굴러간 데 가려면 거북이 결승점 가 듯한다
데크길과 야자수 메트가 깔린 숲길을 벗어나니 광활한 오름 등성이 펼쳐진다. 사진을 핑계 삼아 서너 번 가던 길 멈춰 숨 고르기를 하였을까? 주차장에서 이곳까지 30분 정도 걸린 듯싶다. 월요일 오후 시간대라 그런지 오르내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오름 정상 주위가 나무들로 막히지 않아 주위 경관을 돌아볼 수 있어 좋았다.
앞서던 부부도 힘겨운 오르기를 했는지 잠시 쉬어간다. 먼저 오른 어느 탐방객이 나중 오른 이들을 위해 한마디 던져놓고 하산한다."오른쪽은 경사가 급하니 왼쪽으로 오르세요."
그의 말에 게으른 눈을 돌려 오름을 둘러보니 최정상이 지척이다. 오름은 정상부위에서 분화구를 중심으로 경사진 형태를 하고 있어 다시 최고부 정상을 향해 올라가야 한다.
네비가 이끄는 대로 다랑쉬 오름을 찾아오는데 길거리 도로표지판에는 '월랑봉'이라 써져 있어 잠시 헷갈려한 적이 있다. 오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역주민들이 분화구 모양이 달처럼 생겼다 하여 도랑쉬, 달 랑쉬, 월랑봉이라 부르는데 이는 학자들이 '달 수리'의 변화된 형태로 높은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고구려어에서 유래됐다는 것을 근거로 많이 찾는 중국 관광객들을 위하여 표지판에 한자화 시키느라 그리 부르는 것 같다.
제주에 와서 보니 모든 도로표지판에 행선지가 한자가 병행되고 있는데 본뜻과는 다르게 音을 차용해서 표기해놓은 것들이 많다. 검은오름을 拒文岳, 산굼부리를 山君不利라 해놓았는데 전혀 의미와는 관계없다. 한자는 의미 글자인데 엉뚱한 글자를 집어넣어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아닌지... 물론 제주어를 한자 화하기가 힘이 들것이다. 그래서 그냥 영어 표기만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지나치며 생각한다. 그들은 병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하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다랑쉬 오름은 바로 곁에 작은 오름을 갖고 있다. '아끈 다랑쉬오름'오름 또 다른 말로 '아진 다랑쉬 오름'이라 불려지는데 아끈이란 '작다'라는 것과 아진은 '앉다'의 제주어 관용어적 표현들이다. 보다 높은 다랑쉬오름에서 내려다보니 오름의 분화구까지 내려다볼 수가 있다. 여태 올랐던 오름들 중 이처럼 가까이에서 주위 오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은 다랑쉬가 처음이다. 이곳에서도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있는지 오름 아래에 그들을 위한 주의 표시판이 붙여져 있었다.
제주에서 페러글라이딩이라....
나는 작년 4.3길을 돌면서 한경면에 있는 금오름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도 페러글라이딩을 타고 있던데 제주에서 페러글라이딩은 조금 위험 감이 있다 생각이 든다. 바람이 많은 제주는 주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산세의 영향으로 바람의 방향이 돌변할 수가 있다. 육지에서의 그것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작년 제주 어느 관광지에서 열기구가 강풍에 추락했었던 것처럼 주의가 필요할 것 같다.
분화구 주위를 돌아보니 꼭 한라산 백록담 주위를 도는 기분이다. 대학시절 교수님들과 한라산 주변 광물 채집한다 백록담 정상을 돌며 분화구 아래에 바라보던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고 보니 한라산 등반했던 때가 40년이 다 되는 것 같다. 어리목 산장에서 1박 하고 다음날 영실 코스로 내려오는 코스가 제일이었는데 매년 이 맘 때쯤이면 영실 코스가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여져 있어 장관일 텐데 이번 가을에 영실에 갈 수 있을까?
최정상에 자리 잡은 산불 감시소다. 제주의 오름에는 이처럼 산불감시원이 상주해있다. 오전 탐방객이 올라오기 시작할 시점부터 오름 탐방이 끝나는 시점까지....
그들은 이곳에 근무하며 오후 두 세시쯤 오름과 오름 사이 서로 교신을 주고받는 것 같다. 얼마 전 올랐던 별도봉에서 산불감시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감시원 어르신은 나와의 대화를 중단한 채 교신 시간이 되었는지 그 옛날 각 오름에 봉화불 올리듯이 별도봉을 시작으로 제주시 관내 오름 감시요원들과 이상 유무를 확인하며 산불관리에 안전을 기하는 듯하였다. 그날도 초소를 들려볼까 하다 서산에 걸린 해가 그럴 여유 없다며 뭉기적 대는 나를 오름 아래로 밀어 내렸다.
望哭의 자리!
임을 그리며 통곡의 소리를 내던 자리라는데 누구를 그렸을까? 방향을 바라보니 좌대의 방향이 서북쪽을 향해있다.
제주에는 이처럼 북쪽을 향해 바라보며 임을 그렸다는 臺(대)와 亭(정)이 더러 남아있다. 제주 목관아의 망경루, 조천포구의 연북정들이 그것이다. 제주에 귀양 왔던 양반님네, 파견 차 내려왔던 관리들은 어서 귀양이 족쇄가 풀리기를, 임기가 마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북쪽에 있는 임금을 그렸다는 곳들이 남아있는데 이곳은 그 차원이 다른 곳이다.
1720년 숙종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성산포 고성에 살던 홍달한이란 사람이 이곳 다랑쉬오름에 올라 設壇(설단)하여 분향하며 매달 삭제를 드렸던 곳이다.(삭제:제주는 예부터 고인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초하루와 보름날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
孝 하면 忠 하다는 뜻인가? 전형적인 올랐을 때 제주목사 김윤의 장계를 올렸더니 홍달한에게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고 전하지만 그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는 없다. 동지중추부사란 중추부의 종이품 벼슬로 상당한 고위직인데 나라의 개국공신도 아닌 그에게 이런 관직은 너무 높지 않을까?
다랑쉬에 오르니 그동안의 다른 오름들 보다 조망권이 참 좋다. 제주의 오름들이 한눈에 다 들어오는 듯하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크고 작은 오름들이 볼록볼록 노을이 지는 하늘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신령스러운 곳에 어찌 神話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한라산과 오름을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 이야기에서부터 천지왕, 삼승 할머니, 전상 차지 가믄장아기, 자청비 이야기 등등...
18,000
여 신들이 다 이곳 제주에 모여 사니 제주는 과연 영험한 곳이요, 신령스러운 축복받은 곳이 아닐 수 없다.
오름 아래로 벌판을 가로질러 넓고 기다란 평지가 펼쳐져 있다. 그 주위 좌, 우가 숲으로 이어졌던 것 같은데 인간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다. 활주로인가? 분명 길을 낸듯하다.
며칠 후 다랑쉬오름을 다시 찾아 해설사에게 연유를 물어보았더니 오래전 온천을 개발해보겠다고 손을 댔던 곳이란다. 언젠가 제주에서 온천이 나온다는 뉴스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외국 생활하며 이 뉴스에 접하지 못했지만 제주에도 온천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개발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온천수의 온도가 23c°에 불과해 경제적 가치가 없어 중단 한 건지 포기한 건지는 모르지만 저처럼 방치돼 있어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제주가 제주다움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해안가는 해안가대로 소멸되고, 700여 년 제주를 지켰던 환해장성의 돌들이 어느 카페 집담이 되어 버리고, 숲으로 울창한 제주의 중산간이 이처럼 무차별하게 파헤쳐지고 있다.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제주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올망졸망, 아기자기함을 찾아온다. 육지에 있는 것들이 아닌, 이 세상 어느 곳도 없는 것들을 찾아 들어오는데 이젠 제주 도 글로벌을 찾는 것일까?
편함은 개발을 부른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은 더 편리하게 만들어야 하고....
옛날 제주관광은 보는 관광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즐기는 관광으로 바뀌고 있다. 당연 즐기는 관광이어야 한다.
그러나 즐기는 관광에도 그 가치척도를 감안해 완급을 조절해야 할 것이다. 불편하면 어쩌랴. 그곳에선 그러려니 하여 그 대가를 불편함으로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앞으로 제주개발이 나가야 할 바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미 해는 한라산 너머로 넘어가 모슬포 바다로 떨어지고 있을 것이다.
숲 속으로 나 있는 길이 제법 어둠을 드러내려 하고 있고, 앞서 간 이들은 몇 굽이를 돌았는지 인적이 없다.
숲 속의 꿩들이 이제 잠자리에 들어가려는지 수 십 마리 됨직한 것들이 일제히 울어대 산울림을 하는 듯하다. 앞의 아끈다랑쉬 오름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다랑쉬굴이 근처 어디 있을 텐데...
시간은 6시를 향하고 있다.
일주일 후 다랑쉬오름을 다시 찾았다. 지난주 오르지 못했던 맞은편에 앉은 아끈다랑쉬오름과 다랑쉬굴을 돌아볼 심산이다. 오름 주변에는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비자림, 돌오름, 용눈이오름, 그 외 제주 신들의 본향 송당마을이 근처에 있다. 아마도 이 지역을 다 돌아보려면 족히 이틀을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다랑쉬굴과 지도 위 핑그빛 자전거 트레일 코스만 돌아보려 집에서 출발할 때 차 트렁크에 자전거를 실어놓았다.
다랑쉬오름 건너편에 앉은 아끈다랑쉬오름!
아끈 다랑쉬오름은 개인 소유이다. 제주의 368개 오름들은 각각 소유자가 다르다. 어떤 곳은 제주도가, 어떤 곳은 개인이, 그리고 마을 공동체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오름의 원래 소유자는 마을공동체 대표자들이 소유하며 등기부상 공동명의로 있었다가 그 선조들이 돌아가시고 까맣게 잊고 지내던 서류를 갖고 있던 후손이 자신의 명의로 바꾸고 하는 과정에서 개인 소유지가 된 곳들이 많다. 그러나 다른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이 이제 그 오름의 가치를 알아 소유권 분쟁을 하는 곳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다랑쉬오름의 웅장한 자태가 아끈다랑쉬오름 위에서 보여준다. 평소 낮은 모습의 오름들만 보다가 다랑쉬오름 앞에 서니 자신이 위축됨을 느낀다. 오름 등성이에는 육지의 가을철 추수 지난 논 위에 볏짚을 말아 놓은 것처럼 겨울 동안 마소들의 먹이가 될 목초들을 베어내 말아놓은 하얀 비닐 뭉텅이들이 듬성듬성 놓여있다.
육지의 것들이야 평지 작업이라 수월했을 텐데 저렇게 오름 위 경사진 곳에선 어떻게 작업들을 해 놓았을까?
저것들을 목장으로 옮기려면 집게가 달린 포클레인이 올라가서 작업을 할까? 아니면 아래로 굴려내려 트랙터나 트럭에 상차작업을 할까? 원래는 저 다랑쉬오름도 민둥 오름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제주의 오름 위는 이처럼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데 반해 다랑쉬오름은 60,70년대 조림사업을 할 때부터 일부러 나머지 부분은 목초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남겨두었는지 다랑쉬오름의 반은 민둥 오름 인 채로 남아있다.
아끈다랑쉬오름에 오르니 성산일출봉이 지척에 자리 잡고 있다.2년 전 새해 아침 아들과 제주시에 위치한 사라봉에서 새해맞이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우리 부자는 새벽에 일어나 성산 일출봉으로 이동해 새해를 맞이 하려다 일출봉을 향해가는 차량들이 마치 이슬람의 핫즈를 위해 성지를 향해 가는 것 같은 긴 행렬에 엄두가 안나 차를 돌려 사라봉 정상에서 솔나무와 오름 사이로 삐죽이 올라오는 새해를 바라보며 새해 소망을 빌었는데 내년 새해맞이는 이곳 다랑쉬오름이나 아끈 다랑쉬오름에서 하고 싶은데 조망권이 최고의 지점이라 아마도 발 빠른 사람들 이곳 역시 선점할 것이다.
오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용눈이오름이 보인다.
제주를 사랑했던 이방인 김영갑!
그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수 백 회 용눈이오름을 찾았다는데 작품 하나를 건지기 위해 눈보라,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오름 위에서 언 손을 후후 불어가며 몇 시간이나 앉아 있었을까? 시시각각 변하는 오름의 모습을 카메라의 앵글에 잡아놓기 위해 그가 기울인 정성을 생각하면 고개를 절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의 길은 구도자가 걸어가는 길과 매 한 가지라는데, 하지만 그는 평생 자신이 하고픈 일만 하고 살았다는 양인자 작가의 시샘 어린 노랫말에 그리 힘겨운 삶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이 든다.
용눈이오름이 있는 곳에는 레일바이크가 운영되고 있다는데 나는 가보질 못했다. 실눈을 하고 오름을 바라보니 풍력발전소 앞에 세워진 차량들이 레일바이크를 타기 위하여 몰려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곳 다랑쉬오름에 차를 세워두고 도보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로 짐작된다. 나중 좋은 날 레일바이크의 페달을 밟으며 가을들판을 달려보는 것도 꽤 낭만이 있을 것 같다.
육지의 가을은 추수를 앞둔 벼 이삭이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출렁거려 황금벌판이라 노래하는데 오름 위의 억새는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거려 제주의 가을 들판을 대표한다.
오름 분화구를 돌며 가을을 만끽하는데 분화구 너머 가족인 듯한 일행이 깔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함께 있음에 즐겁고, 가족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삶의 가치를 느끼는 건 아닐는지...
오름을 내려와 차에서 자전거를 끄집어내려 자전거 트레일로 접어들었다. 다랑쉬오름에서 희미하게 내려다보았던 시설물이 도로변에서 볼 수가 있었다. 어느 기업체에서 세워놓은 연수원 건물이다. 십 수년 째 방치된 건물이라 어딘가 보수가 들어가야 할 건물처럼 보인다. 이곳 다랑쉬오름 근처에는 그 흔한 식당이나 편의점, 숙박시설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는 전기와 물이 들어와 있지 않다.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라면 충분히 들어섰을 법한 일인데 이해가 안 된다. 어떤 다른 문제가 있을까?
숲이 울창한 들길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근처 무 밭에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노임을 받고 밭일을 하는지, 아니면 수눌음 나왔는지 모르겠다.
수눌음이란 집집마다 돌아가며 이웃 간 품앗이를 해주는 육지의 계를 이르는 제주의 고유어다. 옛 부터 제주는 이 수눌음이 발달했다. 이웃이 초상이 나거나 결혼식 날 집안일 제쳐두고 찾아가 음식 만드는 일, 손님 접대, 먼 바닷가 용천수까지 가서 물허벅에 물을 담고 와 물을 부조했으며, 이웃집 밭담이나 집 담을 쌓을 적엔 돌을 이거나 날아와 부조하며 없는 살림에 서로 상부상조하는 습관이 배어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삶이 바빠서인지, 정이 메말라 그런지 웬만하면 일당제 아르바이트를 구하여 대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예로 밀감 수확기엔 일손이 모자라 육지의 노인네들까지 초청해와 먹이고 재우며 일손을 거둔다는데 그 옛날 오손도손 집안 얘기 털어놓으며 나누던 일손은 보기가 어려워진 듯하다.
제주는 노루가 참 많다. 재작년 어느 방송국 지방 뉴스에서 제주에 서식하는 노루가 80만 마리에 이른다 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차를 타고 길을 가다가도 노루가 보이고, 숲길을 지나는데 노루가 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이것들이 개체수가 너무 많아 식량이 모자라는지 마을로 내려와 농작물을 헤집고 다닌다.
그날 역시 가을 수확기를 앞둔 콩밭에 이것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그물을 쳐놓은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이것들 없앤다고 제주에 없는 육지의 삵이나, 여우, 늑대를 풀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오직 사냥에 의존하는 형상인데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것들 개체 수는 줄여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자전거 트래킹 코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미흡하다. 도로 중간중간 비포장도로이며, 돌 뿌리가 솟아있고, 큰비에 물고랑이 생겨 나아가는데 애를 먹었으며 도로표시가 제대로 안돼 가는 길을 찾아 헤매느라 권하고 싶지 않은 도로이다.
20여분을 달려 나가니 이처럼 자전거 트레일 코스라 안내표지판이 보여 보무도 당당하게 우회전으로 진행하여 나갔는데....
결국은 길을 잘못 들어 농로의 끝까지 접어들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커다란 다랑쉬오름은 우측에 앉아 왜 아니 오냐 버티어 있는 형상이고, 지나는 차 소리에 눈동자를 쫓아보니 무밭 건너편 전봇대 사이로 차량이 지나는 모습에 자전거를 이고 밭을 횡단하고 나설까 하는 갈등도 일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 길도 길이요, 저 길도 길이라며 어서 오라는 듯 나를 유혹하는데 가서 보면 큰비에 씻겨 내린 크고 작은 자갈길이요,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도 없는 길이라 되돌아 나오기를 수 차례....
20여 분 숲 속을 헤매다 핸드폰의 네비를 작동시켜 헤쳐 나온 신작로, 참으로 반갑다. 졸지에 숲 속에서 길을 찾는다 헤매다 더 깊은 심산유곡으로 빠지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잠시 찾아왔지만 설마 자동차가 오가는 길이 지척인지라 애써 마음을 다독여 나온 도로에는 은월봉이라 다랑쉬오름 가는 도로표지판이 나를 안심시킨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 오름 가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니 겨우 오름 주차장에 이른다. 잠시 내려 관리 사무실에 가서 불평을 털어놓으려다 내친김에 다랑쉬굴로 향했다.
자전거를 이용해 다랑쉬오름 주차장을 지나 3분여 정도 달리니 다랑쉬굴 가는 길이란 표지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채석장이 보인다. 대로변에 채석장이라니? 채석장이라 함은 대개 돌산을 갉아먹으며 필요한 석재를 구하는데 이곳은 돌산도 아니며 평지를 이처럼 갉아먹고 있었다.
나중 관리사무소를 찾아 문재진 해설사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4.3 당시 이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어귀에 우, 마에게 말을 먹이던 자그마한 우물터와 못이 있었다 한다. 그런데 다랑쉬오름 진입로가 작아 도로를 닦으며 옹벽을 쌓을 석재가 모자라 이곳에 저수장을 만든다는 핑계로 이곳 석재를 캐 간다는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인가가 전혀 없는 이곳에 저수장이 무슨 필요가 있겠으며, 더군다나 한창 도로를 넓히는 도로변에 저수장을 만들어 어디에 이용하려는지.....
이곳은 70년 전 토벌대가 무장대와 마을 사람들의 소통을 단절하기 위하여 중산간 마을에 대한 소개령에 의해 10여 가구가 군. 경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태워져 주민들이 들로, 해안가로 떠나버려 오늘날까지 잃어버린 마을이 된 곳인데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나중 이곳 잃어버린 마을이 4.3 유적지로 이용할 수도 있을 텐데 업자가 신청했다고 더럭 관에서 허가를 내준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다랑쉬굴은 1991년 12월 22일 당시 4.3을 연구하던 '제주 4.3 연구소'조사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다랑쉬굴을 찾아가는 길목은 당시의 마을에서도 깊숙이 들어간 곳이어서 마을 사람들도 찾아내기 힘든 곳에 위치해 있다. 대로변에서 5~600m 좁은 농로를 찾아 들어서니 다랑쉬 굴 가는 길 표지판이 눈에 띈다. 오가는 이 하나 없고 간혹 주위를 날아다니는 새소리만 째잭 거리고 조용한 적막만이 흐를 뿐이다.
아! 저곳이 다랑쉬굴이구나.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다랑쉬 굴, 4.3평화공원 내 전시관 안에서 볼 수 있었던 굴이다.
1992년 4월이 굴이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냈던 당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다랑쉬굴의 발견으로 그동안 쉬쉬해왔던 4.3의 역사적 실체를 전국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1948년 해변 마을 종달리, 하도리 주민 중 서너 가구 식구들이 이곳 다랑쉬 굴로 군, 경 토벌대들을 피해 숨어들었는데 당시에 다랑쉬오름 일대를 수색하던 토벌대들에 의해 굴이 발견되었는지, 아니면 토벌대의 겁박으로 마을 사람 누군가에 의해 안내되었는지 다랑쉬 굴은 결국 토벌대에 포위되었다.
토벌대는 수류탄을 굴속으로 던지며 나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겁에 질린 주민들은 굴 안에서 가족들을 껴안고 부들부들 떨 수 밖엔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굴 밖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무지막지한 토벌대의 횡포를 그동안 봐왔던 사람들인지라 그들은 굴 안에서 버티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토벌대는 결국엔 굴 입구에 불을 피워 연기를 집어넣어 주민들을 질식사시킨 것이다.
열한 명의 희생자!
대부분의 20대의 남녀, 그리고 아홉 살의 어린애와 50대 부녀자.
이들은 산에서 무장활동을 하던 산사람이 아닌 선량한 양민들로써 군경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숨어있다 이처럼 변을 당한 것이다.
열 한구의 유해는 45일 만인 1992년 5월 15일 한 줌의 재가 되어 김녕 앞바다에 뿌려졌다. 역사의 현장인 다랑쉬 굴이 나중 성역화되어 사람들이 발길이 이어질까 하는 지레짐작에 정보기관과 행정당국이 이를 차단하려 서둘러 행해진 일이었다.
발견 당시 열 한 구의 유골만 수습한 채 굴은 곧바로 봉쇄되었다.
그날에 본 다랑쉬 굴은 입구만 한 커다란 바위덩이 한 개와 그 사이사이를 메꿔 주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70년 전의 그 아픔의 역사가 행여 밖으로 새어 나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암울한 역사의 빛을 채어갈까 꽁꽁 감싸 놓았다.
나는 다랑쉬 굴을 뒤로하여 돌아 나오며 언제 저 굴이 열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눈 가리고 아웅 한다"라고 해야 하나?
세상 사람들 이제 저 다랑쉬 굴의 슬픔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저리 막아 놓으면 당시의 악행을 사람들이 모를 거라 생각하는지 참 우매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 폐부까지 드러내 우리의 후손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저 동굴 문을 반드시 열어 놓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돌문으로 굳게 닫혀있는 저 다랑쉬 안을 나는 지난여름 제주를 찾은 아들과 찾은 적이 있다. 1년에 대 여섯 번 정도 나는 이 평화공원을 찾는다. 자료를 얻기 위하여,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람들의 4.3에 대한 느낌을 찾아보기 위하여....
평화공원을 방문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느끼고 있는 모습을 보며 참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맨 처음 귀향하여 찾았을 때의 공원의 느낌과 엊그제 찾았던 느낌이 사뭇 다르다. 지금의 평화공원 주차장에는 차를 주차하기가 힘이 든다. 3년 전 그곳은 언제든 찾아가도 주차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지만 지금은 각급 학교 수학여행단이 타고 온 버스가 줄을 서 기다리고 있고, 승용차 역시 주차장을 가득 메워 부득불 공원 내 위령제단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 주차를 하고 내려오는 경우가 다반사라 몸은 번거롭지만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묻혀있던 제주의 비극이 세상에 알려져 그들과 공감대를 나눌 수 있으니 제주사람만이 외로이 간직하던 슬픔의 역사가 온 국민과 나눔을 할 수 있는 게 이 얼마나 고대해왔던 일이 아니겠는가.
그날에도 두셋 학교의 수학여행단이 찾아와 각 전시실마다 해설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재단 로비엔 수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화재단 전시실 다랑쉬 굴 전시장을 들어서면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울린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유골들이 굴 속에 누워 있을까? 그들은 전시대를 중심으로 모여 서 해설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안타까움과 탄식의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온다.
전시실은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무쇠 솥이 놓여있고, 석쇠, 화로, 구덕, 물 허벅 그릇 등 굴 속에서 생활하며 쓰였던 생활도구들이 놓여 있었으며 매운 연기가 폐부를 스며들어 타는 가슴을 부여안고 쓰러져 있는 형상들을 그대로 옮겨 와 사람들 앞에 놓여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다랑쉬 굴은 이렇게 40여 년 동안 묻혀있었다. 유족들과 그 이웃들은 그날의 슬픈 역사를 알고 있었지만....
세상이 모든 것을 함구하며 살라기에 그들은 내 아버지, 내 형제, 나의 고모가 저 굴 속에서 희생되어 시신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수습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만의 가슴속에 품고 살아왔었다.
70년이란 세월이 흐른 이때까지도 그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안돼 과거 속의 갑남을녀 마냥 역사의 언저리에 묻혀 죄 없이 죽어간 그들은 이곳 다랑쉬 굴 말고도 제주공항이 있는 정뜨르 들판과 오등동, 그 외 살아있는 증인들에 의해 오르내리는 지역에 이런 유골들이 수 백, 수 천 기가 묻혀 있을 거라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쉬이 발굴 작업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예전처럼 강압적인 당국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에 얽혀 이 제주 땅 곳곳에는 억울한 죽음의 육신들이 묻혀있음을 우리는 잊고 지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랑쉬오름 관리 사무실이 오름 진입로를 지나 세워져 있다. 이곳은 도에서 관리하고 있고, 그곳에 근무하는 해설사들도 제주 문화관광과에서 업무지시를 받는다고 한다. 나는 지인의 소개로 문재진 해설사를 찾아 들어갔다.
관리사무실엔 세 분의 해설사가 근무한다. 사무실 문을 노크하니 그들은 싸고 온 도시락을 펼쳐놓고 식사 중이었다.
내가 다른 해설사들을 제쳐 놓고 굳이 문재진 해설사를 찾게 된 것은 그의 전직이 경찰관이기 때문이었다. 김녕리 출신인 그에게서 나는 4.3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4.3은 아주 어렸던 시절이 이야기라 도출하는데 실패하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분한테서 아주 소중한 책자를 선물 받았다. 1988년 아직 4.3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게 허락되지 않던 시절 발간된 '잠들지 않는 남도'를....
참 읽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오랜 세월 햇볕에 색이 바랜 책 표지와 책갈피가 30년 세월의 흐름을 말해 주는 듯하다.
나는 2회에 걸쳐 다랑쉬오름 일대를 방문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관리상의 애로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다랑쉬오름에는 자체 확보된 주차장이 없어 개인 소유의 땅을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처음 다랑쉬오름을 방문하던 날 배탈이나 화장실을 찾았을 때 화장실 창문에 "화장실에 화장지 없음" 글귀가 써 붙여있어 주차해 둔 차로 다시 돌아가 화장지를 준비하고 일을 처리했었던 황당했던 일로 화장실 이야기를 꺼냈더니 화장실은 구좌읍 소유라 구좌읍에서 파견된 사람이 관리하고 있고, 또한 상수도가 설치가 안돼 식수는 자신들이 출근할 때 준비하고 , 화장실 물은 구좌읍 물차를 이용하여 공급받는다 하는데 1년에 1,500만 이상이 찾는다는 제주에, 3대 세계문화유산 획득이란 쾌거를 자랑하는 제주에 어찌 전 근대적인 방식으로 관리되고 있는지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다.
나는 올 한 해 남북정상이 만나고 그 협상의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것들을 보며 앞으로 남. 북경협이 됐을 때를 내다보며 제주관광의 위기를 점칠 수가 있었다.
그 첫째가 북한이 금강산, 개성, 백두산 개방이란 물꼬를 터트려 놓았을 때 그동안 제주를 찾았던 국내인은 물론이요, 세계인들이 북으로 향한다면 제주관광은 어찌 될까? 이는 불을 보듯 뻔한 이치가 아닐까?
이제 제주의 관광산업은 그동안 앉아 있으면 찾아온다는 기존의 프리미엄 만을 팔아먹는 권리를 버리고 앞으로 다가 올 제주관광의 위기를 인식하여 그에 대처해 나가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 놓아야 할 시점이라 생각된다. 전 세계인에게 알려진 아름다운 제주가 자연환경의 인프라를 제대로 활용 못하면 제주의 관광산업은 퇴보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세계는 넓고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곳은 많기 때문에...."
소나이
35년 만에 고향 제주로 돌아왔습니다. 탕자가 세상 떠돌다 아버지 품이 그리워 돌아오듯이…
나고 자란 고향을 너무나 모르기에 변해버린 제주를 배워갑니다.
http//blog.naver.com/hanlacho3
제주 스토리 고팡 콘텐츠 크리에이터는 제주의 숨겨진 콘텐츠를 기획, 관광객 및 도민들에게 심도 있는 콘텐츠를 풀어 설명해줄 제주를 가장 잘 아는 각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합니다. 고팡은 제주어로 창고를 말합니다.
제주도 공식 관광 포털 비짓제주(www.visitjeju.net)